Dr Yoo's ESG MBA (3)_ 지속가능경영, ESG의 역사(1)
Dr Yoo's ESG MBA _ 지속가능경영 이해와 실행(3)
지속가능경영/ESG의 역사(1)
1. 산업혁명 ~ 19세기 :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동환경 개선
산업혁명의 발원지였던 영국과 유럽에서는 ‘노동자들을 보다 생산성 높은 상태로 만드는 것’에 대한 경영자들의 관심이 CSR과 지속가능경영의 초기 개념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까지 영국 런던을 비롯한 산업혁명의 중심이 되었던 유럽의 주요 도시들의 공공위생, 주거, 교육, 의료 환경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현재와 같은 도시 인프라와 공공 사회복지서비스가 갖춰진 것은 20세기 초반을 지난 후의 일이다.
이렇다 보니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고 병에 쉽게 걸렸다. 특히 결핵이나 독감과 같은 전염병이 돌면 공장 노동자 대부분이 결근하는 사태도 종종 일어났다. 또는 일하다 작은 부상이라도 당하게 되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주는 노동자들을 건강하고 생산성이 높은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업이었고 기업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런 이유때문에 기네스 맥주와 같이 직원의 노동 및 생활 환경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기업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례 : 기네스 맥주의 직원 행복 경영>
1759년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시작된 기네스는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맥주 회사 중에 하나이다. 설립자인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 1725-1803)와 그의 아들과 손자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아일랜드 흑맥주를 영국과 유럽 전역에 확산하는데 몰두하였지만 증손자인 에드워드 세실 기네스(Edward Cecil Guinness, 1847-1927)는 가문에 이어져온 자선의 전통을 기업 경영과 결합하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를 하였다. 기네스 가문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집안으로 기업이 성장함에 따라 더블린 지역 교회 자선활동에 꾸준히 기부하고 있었다. 기네스의 4대 경영자인 세실 기네스는 자선사업의 범위를 기업 내부로 끌어들여 「직원의 행복이 기업의 성장을 낳는다」는 경영원칙을 세웠다. 세실 기네스는 “직원들이 돈을 벌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지 않으면 회사가 돈을 벌 수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당시 기네스의 급여는 더블린의 다른 맥주회사들 보다 항상 10~20%가 높았다.
세실 기네스가 기업을 운영하던 1870년대 당시 더블린은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고 도시 전체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주택난, 의료난, 교육난이 심각했다. 세실 기네스는 직원들이 주택난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자 1872년 직원들을 위한 임대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1890년에는 회사와 직원이 공동으로 출자한 「기네스주택신탁」을 창립하여 주택건축과 임대사업을 시작했다. 지금도 더블린을 비롯한 영국 곳곳에서 기네스 주택단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회사내에 의료센터를 만들어 의사와 간호사가 상주하도록 했다. 기네스 의료센터에는 직원과 직원가족들이 언제든지 무료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이 지난 후 기네스 의료센터는 규모를 키워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주민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1890년대 기네스 직원들을 위한 복지제도는 21세기 기업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직원들은 회사 식당에서 세 끼의 식사와 맥주 2파인트(1.14리터)를 무상으로 제공 받았으며 생일과 명절, 결혼기념일에는 더블린 지역 상점에서 상품으로 바꿀 수 있는 복지 쿠폰을 보너스로 받았다. 또한 출산한 직원 부인을 위해 영양식품을 제공하였으며 가정 방문 간호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결핵이 유행하자 치료를 받는 직원들을 위해 시외곽에 독립 요양원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퇴직자들과 사망한 직원의 가족들을 위한 연금 제도를 운영하기도 했다.
20세기 초반에 기네스는 명실공히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직장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30세 이하의 모든 직원들이 더블린의 기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를 지원하였고 회사 내에 도서관, 체육관, 운동장, 공원, 수영장을 설치하고 직원들은 조각, 미술, 가구제작, 사진촬영, 악기, 성악, 댄스 등의 취미 프로그램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직원 부인들을 위해 바느질, 요리, 인테리어, 정원가꾸기, 모자만들기 등의 교양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매년 모든 직원이 가족과 소풍을 즐길 수 있도록 유급 휴가를 받았다. 소풍을 위한 기차 티켓은 물론이고 식비와 각종 오락비도 회사가 모두 지원해 주었다. 미혼인 직원들은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으며 비용 전액을 회사에 청구할 수 있었다.
직원이 행복해야 회사도 잘된다는 기네스 가문의 경영철학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더블린의 기네스 공장은 지금도 아일랜드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직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기네스 맥주가 직원들의 행복을 최우선 순위로 여긴다는 확실한 증거는 3~4대째 기네스 맥주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수가 수백명이 넘는다는 사실이다. 자녀와 손주들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좋은 회사가 되는 것,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첫걸음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YMCA(미국, 1844년), 유나이티드웨이(미국, 1887년 ), 세이브더 칠드런(영국, 1919년)등 종교를 바탕으로 한 자선단체들이 설립되면서 기업가들의 자선활동도 활발해졌다. 당시에는 기업 법인 차원의 사회공헌 개념은 없었고 기업가 개인의 자선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미국이나 영국, 유럽 대부분의 기업가들은 카톨릭이나 기독교, 또는 성공회의 신자였기 때문에 신앙을 바탕으로 자선단체에 후원하는 것을 성공을 증명하는 명예로 생각했다.
당시 대표적인 기업가이자 자선가였던 미국의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부(富)는 하나님이 나에게 잠시 맡긴 것으로 나는 청지기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하며 자선에 사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라는 내용의 책을 쓰기도 했다. 이때부터 기업가의 후원을 받은 학교, 병원, 도서관, 극장, 교회, 공원, 묘지 등이 많이 생겨났으며, 석유왕 존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 자동차왕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와 같이 크게 성공한 기업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딴 공익재단을 설립하는 일이 이어졌다.
2. 19세기 ~ 20세기 초 : 식민지 찬탈과 국영기업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세계는 격동의 시기였다. 영국을 필두로 유럽 각국과 미국, 일본 등은 제국주의에 기반한 식민지 쟁탈에 혈안이 되었던 때였다. 당시 식민지 개척의 목적이 자원확보, 시장 확대에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개척의 선두에는 기업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영국동인도회사(1600년 설립), 네덜란드동인도회사(1602년 설립), 일본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 설립) 등은 군대를 등에 업고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 조선 등을 침략하여 자원을 강제로 빼앗고 자국과 기업의 이익을 위해 다른 국가의 주권을 짓밟았다.
식민지 침략에 앞장섰던 기업을 CSR 차원에서 일반적인 민간 기업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 조선을 침탈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창립자가 '이토 히로부미(조선총독부 통감, 일본군 장군_안중근의사에 의해 피살)'였으며, 영국이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최고 경영자 또한 왕실과 연관된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런 기업은 국영기업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하다. 어찌되었건 식민지에서 강제로 빼앗은 자원으로 이들 국가는 국부(國富)를 쌓았고 이것이 현재 유럽과 미국, 일본의 경제적 근간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3. 20세기 초반 : 1차 세계대전, 대공황, 2차 세계대전
유럽국가간 식민지쟁탈 경쟁과 민족분쟁 등 신제국주의가 원인이 되었던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과잉생산, 금융 불안, 실업자 증가 등으로 발생한 경제대공황(1929~1939), 대공황의 경제위기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지위를 벗어나기 위해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그리고 새로운 이데올로기 전쟁의 서막을 알린 한국전쟁(1950~1953)은 20세기 전반의 세계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기업들은 전쟁무기와 물자를 만들고 공급하면서 최신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켰다. 또한 현대적 의미의 기업경영방식과 글로벌 가치사슬과 공급망을 체계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과 경제공황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위기는 기업의 규모를 크게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미국, 유럽, 일본의 기업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몸집을 불렸으며 전쟁시기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 복구과정에 참여하면서 거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격동의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업가들이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해야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생기도록 하는데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46년 미국 경제지 포춘(Fortune)이 미국의 주요 기업가를 대상으로 '기업이 상품을 만들거나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금을 내는 손익계산 차원의 책임 외에 더 넓은 의미에서 국가의 안보와 발전, 시민복지를 위한 역할도 해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93%가 그렇다고 응답 했으며, '이런 책임 의식을 갖는 주변의 기업인이 얼마나 되는가?' 라는 질문에 '절반이상 3/4정도가 된다'고 답했다.

○ 벌 vs 도드 논쟁 :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쟁 본격화
1차 세계대전이 주요 원인이 된 경제 대공황(1929~1939)으로 인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사회불안정이 지속되자 미국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컬럼비아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아돌프 벌(Adolph Berle)과 하버드대 법학 교수인 메릭 도드(Merrick Dodd)의 논쟁으로 CSR 역사가들은 이를 <벌-도드 논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벌은 기업은 주주의 개인 사유물이므로 사회적 책임이나 목적을 고려한 경영을 하는 것은 주주의 동의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주주 중심적 경영을 강조하였지만, 도드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도드는 기업의 목적은 주주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을 넘어서 노동자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고 소비자들에게 좋은 품질의 상품을 판매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것까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드의 주장은 이후 이해관계자 경영이론으로 발전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대다수 주주와 기업가들은 벌의 주주 중심 경영에 손을 들어주었으며 기업 차원의 사회적 책임보다는 성공한 기업가의 개인적인 의지를 반영한 자선사업을 선호했다. 주주와 기업가의 이런 선택과 선호는 기업가의 개인적인 자선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분리하는데 영향을 미쳤으며 1960년대까지 기업가의 개인적 자선활동이 기업사회공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1950년대 : CSR에 관한 연구가 본격화되다.
CSR과 지속가능경영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1950년대 이전에는 CSR이란 용어가 학계에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950년대 이전까지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사람들이 그리 크게 주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 기업이 사회와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사회와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산업은 농업과 축산업 등 1차 산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3년 미국 그린 넬 대학의 하워드 R. 보웬(Howard R. Bowen)교수는 『비즈니스맨의 사회적 책임』 을 출간했다. 이 책은 사회적 책임의 개념을 비즈니스 영역에 적용한 첫 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보웬은 거대 기업이 점점 더 많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가의 의사결정이 여러가지 면에서 시민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영향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보웬은 '기업인들이 기업의 정책을 만들때나 의사결정을 할 때 우리사회의 목표와 가치면에서 바람직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는 것이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보웬은 기업가의 자선 기부를 부자인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실행한 것일 뿐 기업을 경영하는 기업가나 기업 법인의 사회적 책임과는 구분해야한다고 했다.
보웬은 기업가가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구체적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경영진의 사회인식에 대한 변화와 이를 위한 이사회 구성의 변화, 외부감사제도의 도입, 기업가에 대한 사회교육, 비즈니스 윤리강령의 제정과 실천, 그리고 CSR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사회과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과 제안은 1950년대 이후 CSR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지를 밝혀주는 등대 역할을 했으며 현재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Balanced CSR & ESG 유승권
지속가능경영, ESG 교육과 컨설팅은 이노소셜랩 ESG센터 "인스비" 로 ☞ 클릭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