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CSR의 역사(1)
조선후기~일제강점기
CSR의 역사를 보는 관점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의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이냐에 따라 그 시작을 다르게 설정할 수 있다. CSR을 사회공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좁은 시각에서 보면 기업가나 기업이 기부나 자선을 시작한 시기로 그 시작을 정할 수 있고, 인권, 노동권, 환경, 소비자 보호, 공정거래, 윤리경영, 준법경영 등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적 책임으로 보면 각각의 주제에 따라 그 시작이 들쑥 날쑥 할 수 있다.
한편, CSR이라는 용어와 개념 자체가 미국에서 1950년대 이후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CSR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학문적인 입장도 있지만 용어와 개념이 없었다고 해서 존재나 행동 자체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편협된 시각이다.
미국과 영국에서 발간된 CSR관련 책과 논문을 보면 CSR의 역사를 근·현대적 기업이 탄생한 산업혁명 당시까지 거슬러 살펴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에도 기업들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책임 개념이 존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산업혁명 시기에 CSR이란 용어 자체는 없었지만 당시 법이나 사회, 종교 윤리에 따르는 기업가 나름대로의 기업 운영 철학과 윤리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CSR을 현재의 기준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기업이 존재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 사회적 요구와 기대수준, 이해관계, 기업가의 사회·윤리의식과 경영철학 등에 따라 파악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시각이 주요 CSR관련 학자들의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정리하면 CSR의 역사는 기업의 역사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 CSR의 역사를 파악하는 가장 기본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1876년 : 강화도 조약과 개항
CSR의 역사를 기업의 역사와 같다고 본다면 우리나라 CSR의 역사도 근·현대적 기업이 탄생했던 조선후기/대한제국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일본군의 무력 앞에 무너져 막을 내린 사건이 1876년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이고 이후 일본, 청나라, 러시아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선교사들에 의해 서구 문물이 급속히 전해지면서 우리나라의 산업도 조금씩 근대화되기 시작했다.
1900년대 이전 : 개성상인과 객주
조선에서 근대적 의미의 기업 탄생은 상업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바다를 이용한 중국, 한반도, 일본 간의 삼각무역은 고려시대때부터 발전했으며 이때부터 수백년 동안 계보를 이어온 개성상인들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인삼, 은 등의 무역을 크게 성공시켜 민족자본을 형성했다.
송상이라 불렸던 개성상인들은 지금의 상업협동조합과 같은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1899년에 설립된 민족계 은행인 대한천일은행(대한천일은행→조선상업은행→한빛은행→우리은행)의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다. 개성상인들이 비록 현재의 무역회사와 같은 단일 기업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무역을 통해 해외 자본을 국내에 유통하고 민족자산을 형성하여 일제강점기 식민지 은행에 대항하는 민족계 은행을 설립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조금더 거슬러 올라가 정조(재위 1776년~1800년)때 제주도에서 객주를 운영하여 큰 부를 쌓은 김만덕을 우리나라 기업사회공헌의 시초라 보는 의견도 있다. 객주(客主)는 물건이 많이 오고가는 포구나 시장에서 상인들의 물건을 맡아두거나 거래를 주선하는 중계 상인으로 지금의 도매 유통업과 같은 기능을 했다. 조선 중기부터 발달한 객주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중개 유통업 뿐만 아니라 무역업, 금융업, 숙박업, 요식업을 겸하기도 했으며 국내 주요 항구에는 1970년대에도 객주가 남아있었다.
제주 객주의 창업가 김만덕(1739~1812)은 12살에 부모을 잃고 제주 관기에 돌봄을 받아 자랐다. 성인이 된 후 제주 포구에 객주를 차려 제주에서 한양 궁궐로 향하는 관납 물품과 육지에서 생산된 쌀, 화장품, 공산품 등을 제주에 들여와 큰 부를 쌓았다. 거부가 된 김만덕은 제주에 흉년이 들때마다 쌀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가난한 병자와 고아,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평생 지속하였다. 제주도 사람들은 김만덕을 의녀(義女)라 칭송했다. 이런 선행은 임금에게도 알려져 정조가 직접 김만덕을 궁궐로 불러 상을 내리기도 했다.
1896년 : 박승직상점 개업
궁궐과 관청 납품을 독점하던 육의전(六矣廛)의 독점권이 갑오개혁(1894년)에 의해 폐지되면서 안정된 상점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던 행상들에게 기회가 왔다. 10년동안 서울과 경기일대에서 행상 일을 하며 돈을 모은 박승직은 1896년 종로4가에 박승직상점을 열었다. 이 상점이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업 두산그룹의 시초이다.
박승직상점은 주로 면화제품을 거래하는 포목점이었다. 당시 포목은 조선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품이었다. 초기에는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생산된 면직물을 도소매하였고, 중국을 거쳐 들어온 영국산 면을 판매하기도 했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이후로는 값싼 일본산 면이 시장을 장악했다.
1907년 일본의 강제 차관 때문에 국가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이를 국민의 힘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대구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박승직은 서울에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청년들을 강제 징병과 징용으로 끌고가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자 주변의 청년들을 상점에 취업시켜 강제징용을 막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승직이 친일기업가로 기록되어있다. 박승직은 1910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암살한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는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이자 위원으로 참여했다. 이후에도 박승직은 친일단체 설립과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1919년 조선경제회 이사, 1921년 일선(日鮮) 기업의 융합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산업대회의 지방위원, 1922년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 1924년 동민회 평의원에 선임됐다. 1938년에는 조선인 강제징용과 위안부 모집 등에 앞장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편)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38년 2월 2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는 ‘쌍수드러 축하’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박승직은 “조선인에게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게 된 것은 조선인의 의무. 내선인의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승직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1만 원을 일본 해군에 헌납했고 그 이후에도 두 차례 더 헌납했다. 박승직이 창씨개명한 이름은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다. 1941년에는 사명을 ‘미키상사’로 바꾸었다.
박승직은 한일병합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 조선기업가로 활동하였지만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 대표적인 친일기업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896년 : 동화약방 개업
어느기업이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업이냐를 두고 늘 두산과 옥신각신하는 동화약품도 1896년 동화약방이는 이름으로 개업했다. 확실한 것은 동화약품의 마크인 "부채표"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등록상표라는 점이다.
동화약방을 창업한 '민강(1883년~1931년)'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기업가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민강은 일제로부터의 국권회복을 위해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동화약방의 수입 중 상당부분을 민족주의 교사양성과 학생 장학금으로 사용했고 동화약방 안에 직접 공부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1907년에는 뜻을 같이하던 전경현, 장경관 등과 소의학교(昭義學敎_현재 동성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1918년에는 서울대약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약학교 설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민강은 각계 인사 80여명과 함께 비밀결사대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한성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대동청년단은 해방 당시까지 발각되지 않은 독립운동단체로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국내에서 지원한 대표적 국내 독립단체이다. 상해임시정부는 국내와 연락을 위해 서울 연통부와 교통국을 조직하였는데 민강은 서울 연통부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동화약방의 활명수는 당시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인기있는 약품이었다. 활명수의 가격은 당시 50전으로 현재로 환산하면 한병에 만원이 넘는 고가의 약품이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건너갈때 일제의 검열을 피해 돈 대신 활명수를 가져가 현지에서 더 비싼 가격에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활명수는 민강의 아버지인 민병호가 개발한 신약으로 민병호는 조선과 대한제국(1897~1910)의 관원으로 일하면서 왕실 의약관원들로부터 전해들은 의약술과 서양 선교사들로부터 배운 서양 의술을 결합하여 활명수를 만들었다고 한다. 활명수는 국산 양약 1호로 등록되어 있다. 이후 민병호는 활명수를 상품화하기 위해 맏아들인 민강과 함께 동화약방을 개업했다.
민강은 독립운동에 연루된 혐의로 1921년 투옥되어 1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일했다.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온 민강은 동화약방 재기에 힘을 쏟았으나 다시 체포되어 일제의 모진 고문과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1931년 4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동화약방 창업주인 민강 사후 1937년 윤창식이 동화약방을 인수했으며 현재까지 동화약품은 윤씨 가문이 승계하고 있다. 윤창식 또한 민강의 뜻을 이어 '조선산직장려계', '신간회' 등에 참여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산업과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윤창식사장의 뒤를 이른 윤광열(동화약품 명예회장)은 일제말기 중국에서 광복군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10년 이전 조선의 공업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강제 개항은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급격한 공업제품의 수입 증가로 국내 수공업의 몰락을 가져왔다. 조선의 공산품 수입 규모는 1877~1882년간에 총 460만3,000원에서 1910년에는 3,978만1,000원으로 단숨에 52배 가량이나 늘어났고, 1886~1910년간의 수입총액은 3억 9,142만 1,000원에 달했다. 당시의 주요 수입품은 면직물이었다.
중국과 일본에서 방적 기계로 만들어진 값싼 면화가 물밀듯이 밀려오자 박승직을 비롯한 종로의 포목상들은 십시일반 자본을 모아 조선 최초의 기계식 공장인 종로직조사를 1900년 설립했다. 이후 1902년 사기(그룻)제조소, 김덕창직조공장, 1903년 한성전기, 1905년 한성인쇄국, 1907년 기와, 토관공장이 근대 기계식 공장의 형태로 설립되었다. 1909년에 이르면 정미공장 31개, 통조림공장 3개, 식음료/담배 공장 61개, 기와/석회공장 13개 등 중간재공업에 23개 공장, 면직공장 3개 등 섬유공장 4개, 기타 22개 등 조선의 기계식 공장수는 109개로 증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1930년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량생산기지이자 중국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 그리고 일본의 공업생산물을 판매하는 식민지 시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밖에 없었다. 식민지 약탈 구조 속에서 조선의 산업이 균형있게 발전 할리 만무였다. 산업에 근간이 되는 금융은 일본 총독부가 세운 조선은행(1911년)이 장악한 후 민족계 자본이 형성되고 성장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였다.
경술국치 2년전인 1908년에 설립된 동양척식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경제 독점과 토지, 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국책회사로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 공기업이었다.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조선의 모든 무역이 통제되었으며 일제는 경술국치 이후 화폐개혁과 토지개혁을 명분으로 구한말 축적된 민족자본을 무력화하는 한편 농지를 헐값에 빼앗고 국민의 주식인 쌀을 일본으로 대량 반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한일병합 후 조선총독부는 그해 12월 「조선회사령」을 공포했다. 조선회사령은 우리나라를 일본의 원료생산지와 상품시장으로 육성한다는 고전적인 식민직 이론을 명문화 한 것이었다. 「조선회사령」의 주요 내용은 조선의 회사설립 및 조선 밖에서 설립된 회사가 조선에 지점을 설치하고자 할때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의 회사설립에 허가주의를 채택하여 일본 정부의 정책에 따라 조선의 근대산업발전을 통제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1910년~1930년대까지 일제는 조선을 식량생산과 광물생산 기지로 활용한다는 전략을 유지했다. 이에 따라 우리 자본이 기업을 창업하거나 공장을 건설하는 일을 막았고 공업이라고 해봐야 일본으로 실어갈 쌀을 도정하는 정미공장이 전체 공업의 60% 가까이 차지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던 방직공업은 일본인 회사이거나 친일본 성향의 지주들이 세운 공장들이 대부분이었다.
1919년 : 경성방직 창업
1910년 경술국치후 일본으로부터 가장 많이 수입된 제품은 면직물이었다. 유럽식 방직기계를 사용하여 대량생산한 값싼 면직물이 물밀듯이 들어오자 가내 수공업으로 직조한 조선의 면화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박승직등이 참여한 종로포목점 상인협회가 직접 세운 종로직조사가 있었으나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당시 방직산업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내다본 김성수와 박영효는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하기로 하고 민족자본을 모으기 위해 1인 1주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면직산업에 대한 기술부족, 운영능력 부족으로 실제 제품이 생산된 것은 1926년이다.
경성방직은 현존하는 (주)경방의 모태이다. 방직산업은 당시 조선과 일본에서 가장 유력한 산업이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자동차회사인 토요타의 전신은 토요타 방적기계다. 경성방직은 창업 후 해방까지 문을 닫지 않은 조선인이 운영하는 유일한 방직회사였다. 1980년대까지 경성방직은 조선의 민족자본이 설립하고 조선인이 경영한 민족회사로 평가받았으나 이후 일제과거청산 작업이 진행되면서 박영효와 김성수의 친일행적이 밝혀지고 동시에 태평양 전쟁 당시 수천명의 소녀들을 강제 징집하여 24시간 2교대로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일본군 군복을 만들기 위한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기록과 증언이 쏟아지면서 민족기업이라는 명예를 잃게 되었다.
당시 경성방직에 끌려와 강제 노동을 당했던 장규순할머니는 12살이던 1942년초 경북 상주에서 강제 동원돼 서울 영등포 경성방직으로 끌려왔다. 그때부터 해방까지 4년 동안 공장에서 실감는 일을 했다.
할머니는 “밤새워 일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며 “존다고 많이 때렸다. 도망가는 사람도 많았다. 집에 가고 싶어서 매일 울었다. 해방이 되고 무사히 돌아오고 나니 일본사람들이 전쟁하는 데 필요해서 끌고 갔던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회고했다. 할머니는 또 “주방에서 몰래 음식을 훔쳐 먹다가 들킨 애들이 매를 맞고 멍든 얼굴로 벌을 서기도 했다”며 “또 맞을까봐 솜 속에 들어가 숨어 있기도 했다”고 덧붙였다(경향신문 2017.8.13).
1926년 : 중앙학원, 1939년 : 양영재단 설립
현존하는 삼양그룹의 시초인 삼수사는 경성방직을 설립한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가 1926년 설립했다. 김성수와 김연수는 전라북도 고부군의 대지주 김경중의 아들들이다. 삼수사는 집안 대대로 세습된 막대한 토지를 관리하기 위한 농업회사였고 1931년까지 7개의 농장을 추가로 설립했다. 1931년 삼수사의 이름을 삼양사로 바꾸었다. 김연수는 형인 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 경영 및 동아일보 운영 등으로 경성방직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자 2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삼양사와 함께 경성방직을 운영했다.
1929년 김성수와 김연수는 재단법인 중앙학원(현 고려대학교)을 설립하였고 10년 뒤인 193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장학재단인 양영회를 설립하였다. 양영회는 지금도 양영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삼양그룹의 지원하에 운영되고 있으며 장학사업이 주목적사업이다. 양영재단은 기업이 세운 국내 최초이자 최장수 공익재단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김연수는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일제치하에서 나름대로 조선 기업인의 위치를 지켜려고 하였으나 1930년 이후 일제의 강압이 심해지고 기업 경영에 대한 일제의 간섭과 강제가 강해지자 형 김성수와 함께 친일의 길을 걷게 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김연수는 1939년 경성부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받았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경성방직을 기반으로 군수 산업을 시작하였고, 1944년 전쟁 지원을 위한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조선총독부 산하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김연수는 이러한 친일공로로 조선총독부로터 네 차례 포장을 받았다.
김연수는 광복 직후 반민특위로부터 친일파로 지목돼 조사를 받았으나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 풀려났다.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 역비의책 15>에는 김연수가 검찰 앞에서 자신의 죄과를 순순히 시인하고 속죄했다고 적혀 있다.
김연수는 자신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를 통해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 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자기반성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비즈한국 2016.8.13 기사 참조).
1926년 : 유한양행 설립
일본과 대한제국의 친일파들이 한일병합을 도모하던 1904년, 당시 10살이었던 유일한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미국감리회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3세가 되던해 재미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이 독립군 양성을 위해 미국 현지에 설립한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여 낮에는 농장일을 하고 밤에는 학업과 함께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미시간대학을 졸업한 유일한은 1922년 대학 동기와 함께 중국인을 주 고객으로 하는 숙주나물회사 '라이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하여 크게 성공했다. 라이초이 식품회사는 지금도 미국내 중국음식 재료의 40%이상 공급하는 회사로 잘 운영 중이다.
1926년 3월 유일한은 대학시절부터 알고지냈던 중국인 2세 호미리와 결혼했다. 호미리는 의학을 전공한 의사로 유일한과 결혼 직후 조선으로 함께 들어와 유한양행 설립과 약품개발에 적극 참여하였고 세브란스병원 소아과를 거쳐 소아과병원을 개원하여 가난한 아이들을 치료하는 일을 계속했다.
유일한은 함께 창업한 대학동기에게 회사를 넘긴 후 거금을 들고 1926년 귀국했다. 귀국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북간도에 거주하던 가족을 방문하면서 일제의 강압에 억눌린 참담한 동포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유일한이 특히 가슴 아파했던 것은 간단한 치료제를 구하지 못해 아까운 목숨을 잃는 조선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다. 유일한은 세브란스 병원의 에비슨 박사의 조언과 아내 호미리의 도움으로 외국 의약품을 수입하는 유한양행을 1926년 10월에 설립했다.
유한양행은 설립초기 미국으로부터 결핵치료제와 혈청을 주로 수입하여 세브란스병원을 비롯한 국내병원에 공급하였으며, 1933년 진통소염제 안티프라민을 자체개발하였다. 안티프라민은 지금도 대표적인 진통소염제로 판매되고 있다.
1936년 유일한은 국내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하여 직원들에게 자사주를 매입할 수 있는 우선권을 부여하였다. 유일한의 기독교 윤리에 입각한 청렴한 경영철학과 종업원 지주제의 결합은 이후 유한양행을 우리나라 윤리경영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유일한은 조선과 미국을 오가며 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 재미 독립운동가였던 서재필, 박용만이 유일한을 아들과 같이 아꼈으며 이들과 함께 미국에서 한인연합회를 결성하고 미국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유일한은 태평양전쟁이 말기에 접어들자 유한양행을 조선내 독립군 활동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며 미국의 첩보기관 OSS에서 첩보훈련을 받기도 했다. 유일한의 암호명은 A였다.
유한양행은 일제시대 대표적인 애국기업으로 잘 알려져있으나 한편 친일기업의 기록도 남겼다. 유일한이 미국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스탠포드대학에서 법학박사과정을 마치기 위해 1938년 미국으로 간 후 동생 유명한이 유한양행의 경영을 맡았다. 유명한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다.
유명한은 1941년 8월26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하고 홍콩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부 종로경찰서를 방문해 국방현금 1만원(현재가치 약 10억원)을 헌납했다. 이후 전투기 '유한 애국기' 1대 제작비 5만 3,000원을 일본제국 육군에 헌납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일왕의 군대인 황군의 무운을 비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유명한의 친일행위를 일제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라고 두둔하는 사람도 있지만 친일행위, 그 중에서 전쟁무기를 구입하는 자금을 헌납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1931년 : 구인회포목상회설립
LG그룹의 창업주인 구인회와 동생 구회철은 1931년 고향 진주에 구인회포목상회를 개업했다. 포목점으로 시작한 구인상회는 1940년 주식회사 구인상회로 사명을 변경하고 포목을 비롯한 생필품, 생선, 청과물 등을 유통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가 전쟁자금마련을 위해 토지를 매각하자 진양, 함안, 의령, 고성 지역의 토지에 투자하여 땅부자가 되었다.
1942년, 부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민족기업 백산상회(1914~1927)의 창업가이기도 한 안희제가 구인회를 찾아와 독립운동자금 후원을 요청하자 그자리에서 1만원을 선뜻 내주었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전해져 LG그룹은 독립운동을 도운 민족애국기업으로 알려져있으나 실제 구체적인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1942년 중소기업 정리령
일제식민지 악조건속에서도 조선인 기업은 꾸준히 설립되었다.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1920년 조선인 회사는 99개였으나 1929년에는 207개사로 약 2배가 증가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1930년까지 조선 기업인이 활동한 주요 분야는 금융업을 포함한 상업부분이었고 다음이 운수업이었다. 지방의 대지주 및 거상들이 자본을 바탕으로 지방 소형은행들을 설립하여 저축과 소규모 대출 사업을 했고 서민 출신 기업인들은 시장형성과 선박, 화물운송업을 개척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은 조선을 무기와 군수물자 생산기지로 활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이후 무기와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발전소, 중공업 공장 등이 일본 정부와 일본 대기업의 합작으로 조선 북쪽지역 만주와 국경지역에 건설되었다. 다분히 만주를 비롯한 중국침략을 위한 입지선정이었다. 이 때문에 해방 후 대부분의 발전소, 공업시설은 북쪽에 남아 있었고 남쪽은 농업이 산업의 중심이었다.
1938년 조선의 회사 총수는 5,413개사였고 이중 42%인 2,278개사가 조선인 회사였다. 자본총액은 전체 산업의 11% 정도가 조선인이 차지했다. 즉, 조선에서 생산된 90%가 일본인 손에 겨우 10%만이 조선인 몫으로 돌아왔다.
1937년 일본이 만주를 넘어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고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됨에 따라 일본의 전시경제체계는 더욱 강화되었고 조선에서의 자유로운 기업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42년 「중소기업정리령」을 공포하여 강제로 조선인 민간기업을 통합하여 전시물자를 생산하는 국책기업을 설립하였다. 조선총독부에 통합되지 않고 해방때까지 독립기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곳은 기업 규모가 작거나 아니면 스스로 조선총독부에 협력한 기업들이었다.
일제시대에 설립된 현존기업
일제 식민지 시기에 설립된 현존 주요 기업은 경성방직(1919년, 현_경방), 유한양행(1926년), 대성상회(1929년, 현_SK그룹), 삼성제약소(1929년,현_삼성제약), 조선미곡창고(1930년, 현_CJ대한통운),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점(1930년, 현_신세계백화점), 구인회포목상회(1931년,현_LG그룹),강중희상점(1932년, 현_동아쏘시오홀딩스/동아제약), 영도조선소(1937년, 현_한진중공업), 삼성상회(1938년, 현_삼성그룹), 부림상회(1939년, 현_대림그룹), 궁본약방(1941년, 현_종근당), 유한무역주식회사(1941년, 현_유유제약), 조선다이야공업(1941년. 현_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흥아타이어(1942년, 현_넥센타이어) 등
민족기업, 친일기업, 그리고 CSR..
국내에서 발간된 CSR 관련 책과 논문들이 대부분 우리나라 CSR의 시작을 1990년대 이후로 잡고 있다. 국내 저자와 연구자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그에따라 글로벌 스탠다드인 CSR을 도입했다는 논리이지만, CSR을 조금만 공부하면 CSR의 역사가 기업의 역사와 동일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굳이 1990년대 이전의 기업사를 묻어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를 생각해보았지만 저자나 연구자들이 현존하는 기업들의 과거사를 들춰 CSR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라 추측한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대기업의 영향력이 큰 사회에서 스스로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를 들춰내는 사람을 대기업들이 곱게 봐줄리 없다.
나 또한 고민을 많이했지만, 우리나라 CSR의 역사는 우리나라 기업의 역사와 동일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기업들 중 오래된 기업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나라 CSR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빠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일제시대 우리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이었을까? 기업의 생존을 위해 조선총독부에 협력하고 전쟁자금을 헌납한 것을 사회적 책임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일제에 항거하는 행동을 한 것은 분명 민족기업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런 기업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일제의 핍박을 견디지 못해 문을 닫아야만 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업의 문을 닫게 만드는 의사결정이 바른 결정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분명한 것은 역사는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과거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의사결정은 기업의 역사와 함께 기록된다.
CSR을 잘하는 기업은 과거의 역사적 과오를 오늘의 올바른 의사결정으로 회복하고 극복하는 기업이라 생각한다.
참고로, 김성수가 설립한 동아일보는 현재까지 박승직상점과 경성방직을 민족기업으로 기사화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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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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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글을 써놓고 공개할까 말까를 고민했습니다. 기업들의 친일행적이 숨겨진 사실은 아니지만 굳이 들춰낼 필요가 있나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역사니까요. 다음 주엔 해방후에서 1970년대까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블로그 찾아주셔서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