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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CSR의 역사(2) 해방후~1960년대

by Mr Yoo 2020. 6. 20.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 CSR의 역사(2)

해방 후 ~ 1960년대

 

 

친일, 친미세력에게 돌아간 귀속재산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함으로써 조선도 일제에서 해방되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38도선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는 군정이 시작되었다. 해외에서 급히 귀국한 임시정부인사들을 중심으로 38도선 해체와 정부수립이 바삐 논의되기 시작했다. 

 

해방 후 항일 민족세력들은 일본인은 물론 친일파들의 재산까지 모두 국가가 소유해야 하며,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국가가 통제하여 민족자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개인 재산은 보호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1945년 9월 말 조선총독부의 재산만 접수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함께 일했던 종업원이나 지인관계에 있던 친일파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팔고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에 되어서야 국내 여론을 의식해 일본인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했던 토지와 건물을 비롯한 모든 재산도 접수 대상에 포함시킨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재산을 처분하고 떠난 뒤였다. 

 

미군정은 1946년 2월 설립한 '신한공사'를 통해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귀속자산을 관리하다가 1948년 3월 발효된 농지개혁법에 따라 농지는 소작농에게 싼 값에 나누어 주었고 주택과 건물, 공장은 연고자 중심으로 처분하였다. 당시 귀속 자산의 연고자는 대부분 일본인 소유자로부터 재산관리를 위임받았던 친일 지인들로 결국 식민지 시대에 축적된 부는 친일세력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현존하는 기업 중 '몽고간장'은 1905년 일본인 야마다 노부스케가 마산에 일본식 양조간장공장 '산전장유양조장'을 세운 것이 모태이며 해방 후 조선을 떠나면서 당시 공장장이었던 조선인에게 공장을 팔았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일본인 상점들은 대개 이런 과정을 거쳐 친일 조선인의 소유가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그해 8월15일 38도선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6.25 전쟁_군인과 피난민들

 

6.25전쟁과 미국의 원조물품

 

일제시대 건설한 발전소와 공업시설 대부분이 38도선 북쪽에 존재했다. 그래서 해방 후 상당 기간 남쪽은 북쪽으로부터 전기나 공업물자를 공급 받을 수 밖에 없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되었고 그나마 얼마되지 않았던 남한의 주요 공업시설들이 파괴되고 산업의 기반이 사라졌다. 

 

남한의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피난 길에 올랐고 한국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미국은 미군정 시기와 전쟁 중에 의복, 의료품, 농업용품 등 주로 소비재를 지원했다. 전쟁 중과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전쟁 피해 복구와 생산시설 회복에 필요한 원조와 함께 생활필수품과 밀, 면화, 설탕 등 소비재 산업의 원료를 보냈다. 

 

미국의 농산물 원조는 당장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한국의 농업성장에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농업의 기계화, 화학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농업 생산량이 급증하였다. 이에 따라 잉여 생산물이 늘어났고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에 미국 잉여 농산물을 무상으로 원조했다. 1957년부터는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바뀌었다. 

 

미국 원조물자에 의존한 1950년대, 비약적으로 성장한 산업은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산업이었다. 원조를 통해 수입한 밀가루, 원당(설탕), 원면(면화) 등이 모두 힌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 이들 산업을 삼백(三白)산업이라 불렀다. 삼백산업의 경우 일제의 귀속자산을 이어받고 미군정의 특혜를 받은 일부 자본가들이 독점함으로써 이들이 1960년대 이후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1938년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한 이병철은 1948년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전쟁이 끝난 1954년에는 설탕을 만드는 '제일제당'과 면직물을 생산하는 '제일모직'을 설립했다. 원조물자인 원당과 면화를 가공하여 축적한 부가 지금의 삼성그룹의 기반이 되었다.

 

 

 

빼앗길 바에야 좋은 일에 쓰자

 

미군정에 의해 1948년 3월 농지개혁법이 발표되고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1949년부터 실제 집행되면서 지주들의 토지가 싼 가격으로 농민들에게 분배된다. 일부 지주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토지를 기본재산으로 한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1949년 이후 설립된 육영(育嬰_아이를 키움)과 장학재단들이 본래의 목적사업인 교육과 장학사업이 아닌 종교시설, 사립학교 운영 등 다른 사업을 하게 되고 설립자 및 설립자 가족 중심의 독단적 운영을 하게 되자 정부는 1963년 '사립학교법'을 제정하여 학교는 학교법인에 의해서만 운영할 수 있도록 분리했다. 그러나 1976년 '공익재단법'이 제정되기전까지는 이러한 육영재단의 사유화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1961. 5. 16 군사 쿠데타 

 

정경유착, 재벌의 등장

 

미국의 원조와 정부의 특혜가 소수의 자본가에게 집중되는 정경유착(政經癒着)이 6.25 휴전 후 가장 큰 자본 축적의 기회가 됨에 따라 기업과 기업인은 경제개발 초기부터 "부정축재(不正築財)"로 비판받게 되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또한 쿠데타의 명분으로 이승만 정권과 유착하여 부정축재한 기업인과 기업들의 악습을 해소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어 1964년 6월 박정희정권이 한입협상을 진행하는 것에 반대하여 일어난 6.3 항쟁에서도 "악질 재벌 잡아먹자" 라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기업인들은 쿠데타정부에 협조하는 단체를 결성하고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961년 8월 이병철 삼성 회장을 초대회장으로 한국경제인협회(현_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설립되었고 1970년대 시작된 박정희의 정부주도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정경유착은 보다 강화되었다.

 

 

삼분폭리기사_경향신문_1963.2.20

1964년 : 삼분폭리 사건

 

한국언론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용어가 등장한 것은 1964년 1월 삼분폭리(三粉暴利)사건이 일어나면서 부터이다. 한양대 사회학과 이상민교수는 삼분폭리 사건이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념이 사회적으로 탄생하는 기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상민교수는 삼분폭리 사건 이후 한국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의 불상사 발생 → 반성과 자숙 행동 → 휴지기/자숙기 → 기업 불상사 반복>라는 이른바 'CSR의 악순환 쳇바퀴'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삼분폭리사건은 당시 국민생활의 주요물자였던 설탕, 밀가루, 시멘트를 생산하는 기업들이 담합을 통해 가격조작과 탈세 등으로 폭리를 취한 사건이다. 정부의 특혜를 통해 외국에서 들여온 밀가루 원맥을 배정받은 10여개 제분업체들은 원맥을 가공해 출고하면서 기업간 담합하에 정부고시가격의 3배까지 올려 받아 당시 천문학적인 금액인 1백억원 이상의 폭리를 취했고, 설탕과 시멘트 역시 고시가의 3~4배의 담합, 가격조작, 탈세를 통해 막대한 폭리를 가져갔다. 

 

당시 경향신문사설을 보면 "해방 이후 우리나라 신기업군들의 경영을 볼 때 과연 그들은 자기의 사회적 책임을 깨닫고 있는지 또는 민족적 사명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털끝만큼이라도 해왔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음은 유감이다(경향신문 1964.2.18)" 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외에도 여러 신문에서 삼분폭리를 취한 기업을 비판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5년 : 삼성문화재단 설립

 

삼분사건의 중심에 있던 삼성 제일제당 이병철 회장은 공익재단 설립으로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이병철회장은 1965년 자산 10억원을 출연하여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육영과 문화 사업에 힘쓰겠다고 했다. 당시 10억원은 현재 1,000억원이 넘는 가치를 지닌 막대한 액수로 성난 여론을 잠시 잠재울 수 있었다(동아일보 1965.2.6).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용어는 이때부터 언론을 비롯한 정부에서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박정희군사정권은 기업을 관리감독하고 친정부성향으로 만들기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즉, 기업의 자율적 사회적책임 수행이 아닌 제재와 처벌, 심판자의 역할을 정부가 맡아서 하겠다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IMF때까지 정부는 기업의 목줄을 쥐는 역할을 자처하게 되었다.

 

1965년 11월에는 한국경제인협회(현_전경련)가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의 재인식을 다짐하는 '경제윤리강령과 실천요강'을 발표했다. 이를 보도했던 매일경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본질적으로 영리추구가 기본원리이지만 사회제도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피터 드러커의 경영철학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1966년 : 사카린 밀수사건

 

1960년대 가장 큰 기업의 불상사로 기록되는 사카린 밀수 사건은 삼성그룹 계열사였던 한국비료주식회사가 일본에서 인공감미료인 사카린을 밀수하려다 적발된 사건이다. 한국비료는 1966년 5월 공장 건설 용도로 받은 정부차관 4,000여만 달러 중 일부 금액으로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 약 55톤을 구매한 후 건설자재로 위장하여 국내로 밀반입하였다. 

 

한국비료는 이 원료를 다른 회사에 팔려다 부산세관에 적발됐는데 부산세관은 이 사실을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벌금 2,000만원을 부과하는 선에서 무마하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밀수를 '5대 사회악'의 하나로 규정해놓고 있던 상황에서 언론에 이 사건이 보도되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삼성이 불과 2년전 삼분폭리사건을 통해 엄청난 사회적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 이에 국회와 언론은 삼성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결국 사태가 심각해지자 삼성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지만, 2년간의 자숙기를 거친 후 1968년 2월 경영 일선으로 다시 돌아왔다. 

 

 

1959. 11월 금성사 국산 최초 라디오 생산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한국의 CSR

 

우리나라 기업들은 일제 식민지시대, 6.25전쟁, 전쟁 후 혼란기, 군사 쿠데타와 같은 매우 불안정하고 험난한 사회환경속에서 창업하고 생존해왔다. 극도로 불안정한 사회환경 때문에 해방이후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기업들은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생존과 돈" 중심의 기업경영을 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 사작했다. 해방 후 잘못끼워진 첫단추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나라 CSR은 올바른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삼분폭리사건과 삭카린 밀수사건으로 등장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1970년대에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다음 주에 계속~~

 

 

1957년~1969년 국내 주요 경제관련 사건

 

1957 : 미국 무상원조 종료, 유상원조 전환

1959 : 경제개발 7개년 계획 발표

1960 : 3.15 부정선거, 4.19 민주화 운동, 4.26 이승만대통령 하야,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1961 : 5.16 군사쿠데타, 미국 원조감축 발표

1962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증산, 수출, 건설), 산림녹화계획발표, 통화개혁(환→원),

         독일 간호사 1차 출국(20명, ~1976년 1만명 이상)

1963 : 독일광부 1차 출국(광부367명, ~1978년 7,800여명 파견)

1964 : 베트남 파병시작(~1971년, 34만명 파병_미국 1억5천만불차관, 베트남 건설참여권, 미국내 한국수출 증대) 

1965 : 한일기본조약, 한일국교정상화(무상공여 3억불, 유상차관 2억불, 민간차관 3억불) 

1967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공업화, 수출), 구로동 수출공업단지 준공

1968 : 경인고속도로개통   

 

 

1945년~1969년 설립된 현존 국내 주요기업

 

1945 : 태평양화학공업사 (현_아모레퍼시픽그룹), 고려상사(현_고려제강)

1946 : 현대자동차공업사 (현_현대기아자동차그룹 등), 공신약업사(현_일양약품), 광주택시(현_금호아시아나그룹)

1947 : 영일당제과(현_크라운해태홀딩스), 삼일제약(현_삼일제약), 

1948 : 상미당(현_SPC그룹), 롯데(현_롯데그룹, 일본에서 창업)

1949 : 국도건설(현_Sk하이닉스),국제화학(현_LS네트웍스)

1950 : 태광산업(현_태광그룹), 한신축로공업사(현_한신공영),보해양조(현_보해양조)

1952 : 한국화약주식회사(현_한화그룹), 대한제분(현_대한제분)

1952 : 제일제당(현_CJ,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1953 : 대한중공업공사(현_현대제철, 1978년 현대그룹 편입)

1954 : 애경유지공업(현_애경그룹),대흥제과(현_유진그룹),

1955 : 동방해상보험(현_현대해상화제보험, 1999년 현대그룹 분리), 동화백화점(현_신세계, 1991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대한전선(현_대한전선),  

1957 : 한국나이롱(현_코오롱그룹),  

 

..... 계속 추가 중.....

 

 

참고문헌

 

20세기 한국경제사 (정태헌, 역사비평사, 2010)

대한민국경제사 (석혜원, 미래의창, 201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온라인판)

위키피디아 

 

고광명. (2012). 일제하 (日帝下) 조선인 기업가의 사회적 배경 연구. 일본근대학연구37, 441-462.

김용철. (1994). 일제시대 기업의 생성과 발전. 한국동서경제학회 월례/정례발표회4, 77-105.

김인호. (2001). 식민지 공업화 문제의 연구사. 인문학논총4, 285-304.

신장철. (2006). 개항후 식민지 시대의 한국 상사회사에 대한 연구. 경영사연구, (41), 113-131.

이상민. (2016). 한국 CSR 의 역사. 시민사회와 NGO14(1), 93-140.

 

 

Balanced CSR 유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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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저자(들)를 찾습니다.

 

안녕하세요?

 

일주일에 한번 일기처럼 쓰는  「Balanced CSR」의 블로거 Mr Yoo입니다. Balanced CSR 방문자가 40만명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그동안 블로그에 올렸던 글 중에 CSR 초보 실무자들에게 필요한 글들을 선정해 소박한 책을 한 권 낼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단순히 그동안 썼던 글 중에 몇 개를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CSR을 시작하는 실무자들이 함께 참여해 꼭 필요한 책을 내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CSR 초보 실무자들과 함께 책을 써볼 생각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원고는 대부분 제가 쓸 거니까 글을 잘 쓰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글을 잘 쓰신다면 더 좋죠. 

 

CSR을 시작하는 초보자들에게 이런 책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있으신 분, 이번 기회에 기업사회공헌, CSR, 지속가능경영의 기본을 마스터하고 싶으신 분, 저와 함께 올 여름, 책을 한번 써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기업사회공헌, CSR, 지속가능경영 3년 이하 실무자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첫 모임 2020. 7. 8(수). PM 7

 

장소는 이메일 신청자에게만 알려줌..^^

 

gogo197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