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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anced CSR & ESG

우리나라 CSR의 역사(3) 1970년대_국가주의 CSR

by Mr Yoo 2020. 6. 28.

전태일 열사

 

우리나라 CSR의 역사(3)

1970년대_ 국가주의 CSR 

 

차관, 파견, 파병위에 세워진 공업화 

 

1957년 미국의 무상원조가 유상원조로 바뀌고 그마저 미국의 경기침체로 줄어들자 이승만정부는 원조가 아닌 차관(借款)을 끌어들이기 위해 부랴부랴 차관의 전제조건인 국가경제발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이 중장기 경제개발계획을 세워 외국의 개발차관을 끌어들인 일을 우리나라는 한국전쟁과 휴전 후 정치적 혼란을 겪는동안 때를 놓친 것이다.

 

이런상황에서 1959년 3월 발표된 '경제개발 7개년 계획'은 이듬해 1960년 3.15 부정선거와 연이어 발생한 4.19민주화혁명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해 6월15일에 들어선 윤보선정부는 7개년 계획을 다듬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으나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다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국민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1962년 앞서 세워진 계획들을 기반으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목표인 '증산, 수출, 건설'을 실행하기 위해선 자본이 필요했다. 당시 소련과 냉전이 한창이던 미국은 동아시아에 안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이 하나의 묶음으로 미국의 발판이 되기를 원했다. 

 

미국의 지원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이 절실했던 박정희정권은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22일 일본 동경에서 한일기본조약을 조인하고 그해 12월18일 양국 국회의 비준을 얻어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일본은 한국에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를 각각 10년에 걸쳐 제공하기로 했다. 이렇게 일본으로부터 얻은 차관으로 포항종합제철(현_포스코),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가 1970년대 초반 건설되었다.

 

 

1963년 12월 21일 경향신문

 

1960년대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수출이 가능했던 얼마 안되는 것 중 하나가 인력이었다. 1962년 간호사 20명을 시작으로 1963년에는 367명의 광부가 독일로 떠났다. 간호사는 1976년까지 약 1만명이 넘는 인원이, 광부는 1978년까지 7,800여명이 독일에서 일했다. 한국은행의 1968년 자료를 보면 당시 국민총생산(GNP)이 52억달러였는데 독일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한 돈이 5천만달러였다. 전체 GNP의 1%에 가까운 엄청난 액수였다.

 

인력파견은 광부와 간호사에만 그치지 않고 베트남 파병으로 이어졌다. 북한에 대응할 무기가 필요하고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박정희는 미국에 요청에 따라 1964년부터 8년간 34만명의 군인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미국은 한국군의 참전으로 1억5천만달러의 차관과 베트남 내 건설사업 참여권, 미국 내 한국상품 수출 증대를 약속했다. 베트남에서 사용했던 (미군에 지급한) 한국군의 개인화기는 귀국시 한국으로 가지고 돌아와 한국군에 반납했다.  

 

 

1965년 2월9일 경향신문

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얻은 파병수익(파병군인 인건비 등)은 6억4천만달러, 무역과 군수물자 납품을 통해 얻은 수익은 2억2천만달러였다. 이것은 4,600여명의 젊은 목숨과 바꾼 값이다.

 

1975년 베트남 전쟁 종전 후 현지에서 토목, 건설 노하우를 습득한 대우, 현대, 대림 등의 토목, 건설사들이 이후 중동으로 건너가 중동건설의 붐을 일으켰다.

 

 

전태일 열사_EBS자료

 

1970년 11월 13일 :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피복점의 노동자 전태일(22세)은 '근로기준법전'을 손에 들고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일제가 조선을 무력과 강압으로 통제하던 악행과 악습은 해방후 6.25전쟁과 정치혼란기, 5.16 군사혁명을 거치면서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더 증폭되었다. 역사, 사회학자들은 우리나라가 식민지 국가에서 민주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5.16 쿠데타로 인해 병영국가로 후퇴했다고 평가한다.

 

1960년대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근로기준법이 있었으나 지켜지지 않았고 군대와 같은 조직문화가 기업에도 존재했다. 정부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우대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무시했다. 여성은 취학이나 취업이 아닌 결혼, 출산, 육아, 가사노동을 해야했으며 생활고 해결을 위해 취업한 여성은 차별과 추행, 폭행의 대상이었다. 직장에서 상사의 폭언, 폭행은 당연한 것이었고 "산업역군"이라는 미명아래 밤낮 없이 휴일 없이 일해야만 했다. 

 

대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중퇴하고 17살에 상경하여 청계천 피복노동자의 삶을 시작한 전태일은 자신보다 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고생하는 여공들의 현실을 개선하는 일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와중에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독학으로 공부했으나 법전은 초등학교 중퇴인 그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며 "대학을 나왔더라면, 대학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 했던 그의 한탄은 사후 대학생들에게 전해져 1970년대부터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와 노동인권, 노동민주화 운동을 시작하는 주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전태일은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조직하고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했으나 사업주들과 경찰, 노동당국은 그에게 사회주의, 빨갱이 딱지를 붙이고 바보회의 요구를 묵살하고 강제해산하게 했다. 이후 1970년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벌인 '노동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제출한 것이 "경향신문"에 실리며 잠깐 주목을 받았으나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앞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중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가 고용주 측에서 동원한 깡패들에 의해 찢겨지자 전태일은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형식에 불과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고 자신도 함께 타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파이낸셜타임즈 2017.1.23

 

산업보국(産業報國)의 시대

 

1970년 9월9일에 열린 상공인대회에서 당시 주요기업의 총수를 비롯한 4천명의 참가자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준수를 다짐하는 결의문을 낭독했다. "나를 위한 기업보다 겨레위한 기업되자"라는 슬로건에 이어 "방위산업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서명을 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70.9.9). 1970년대 매년 열린 이 행사는 일제시대때 조선총독부에 충성맹세를 하고 태평양전쟁에 무기자금을 헌납하던 방식과 동일했다.

 

5.16 쿠데타이후 10년동안 무력과 강압,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로 국민을 통제한 박정희정권은 1970년대 본격적인 경제성장기에 접어들면서 국가의 산업자본 육성방침에 따라 자원을 전략적으로 배분하였고 경제발전과 권력유지의 전략적 파트너로 기업을 지원하기도 하고 도태시키기도 하였다. 정부가 한국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을 장악하여 신용할당권을 독점하고 모든 사업의 허가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기업은 정부의 권고사항이나 명령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정권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경제발전이 우리 민족의 유일한 살길이라는 "독재를 위한 국가비전"을 제시하고 다른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념에 '국가주의' 색채가 강력하게 주입되었다. 기업마다 "산업보국"을 사훈에 포함시켰고 매년 시무식에서 그룹의 총수들은 대내외 경제위기를 앞세워 임직원의 희생을 요구하고 기업의 성장이 곧 국가 경제의 성장이며 우리 모두의 살길이라는 판에 박힌 연설을 하게 되었다. 주요기업 총수의 신년사는 언론을 통해 청와대에 보고되었고 청와대는 대통령의 주요 시책이 기업 총수의 신년사에 포함되었는지를 확인했다. 

 

정부는 1972년 12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 정책목표로 민간기업 육성을 위한 기업 합리화 가이드라인 4대 원칙을 발표했는데, 1.자금의 조달 및 운영의 건설화, 2. 경영관리의 과학화, 3.기술수준의 제고와 혁신, 4.기업의 사회적 책임의식 양양 등이었다. 이러한 국가주도의 CSR 분위기 속에서 기업들은 진정한 사회문제해결이 아니라 정부에 보여주기 위한 CSR활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전경련은 "기업 이윤이 사회에 환원되도록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의식 제고에 노력하며 사회정화와 정풍운동에 앞장서겠다"고 선언하고 30개에 이르는 실천요강까지 발표하였다(경향신문 1971.7.16). 이어 대한상공회의소도 전국대의원대회를 열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인식과 국민경제 발전에의 기여, 책임경영의 기풍 조성과 신용사회 건설, 근면 검소한 생활기풍과 존경받는 기업인상 확립" 등을 결의했다(동아일보 1971.10.19). 

 

 

 

1972년 4월에는 한독약품이 주요 일간지 1면 하단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한독약품" 이라는 문구를 사용한 기업홍보용 광고를 게재하였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기업광고에 등장한 국내 최초 사례이다.  

 

전경련은 1972년 경제계 차원에서 최초로 사회복지시설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위문품을 전달하는 등 자선사업형태의 사회공헌활동을 시작하고 '정부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형태를 만들어갔다.

 

 

 

새마을 운동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농촌현대화를 목표로 1969년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이데올로기인 "잘살아보세" 의 선전도구이자 전 국민의 일상생활과 노동까지 정부가 동원, 통제하려했던 정부주도형 지역개발사업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농촌 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친정부성향의 한국노총은 1972년 5월 새마을운동실천대회를 열고 "새마을 운동 정신을 이어받은 총화의 정신혁명으로 노사가 공동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준수여부를 감시하겠다"고 선언했다(경향신문 1972. 5.12). 

 

박정희 대통령은 기업인들을 만날때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성은 기업인이 새마을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새마을 정신을 함양하는데 있다고 강조하였으며 기업과 공장들에는 태극기와 함께 새마을기가 게양되었다. 1976년 6월7일 매일경제 사설에는 '새마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사회가 기업인에게 요구하는 사회적 책임의 으뜸"이라는 내용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새마을 운동에 대한 기업의 기금기부를 요구했으며 새마을 운동 본부로 들어간 기업자금 중 상당부분은 박정희정부의 정치자금으로 유용되었다. 이후 전두환정권도 같은 길을 걸었다. 

 

국가주의적, 국가주도적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기업은 "경제유신의 역군"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아 충실히 수행해야 했으며 이 역할 수행에서 어긋날 경우, 즉 유신정부의 말을 잘 듣지않을 경우 국가는 직접 이들을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낙인을 찍어 처벌했다. 1973년 4월6일 정부는 '반사회적 기업인'  73명의 명단을 발표하고 향후 5년간 일체의 금융지원을 중지하였다. '반사회적 기업인'이란 기업법인 재산을 개인재산으로 빼돌리는 등 재산은닉, 대출유용, 탈세 등을 한 기업인들이다.

 

반사회적 기업인에 대한 조사와 처벌은 197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표면상으로는 기업인의 탈세, 외화은닉, 해외도피, 위장이민, 도덕적 탈선 등을 처벌하는 것이었지만 한편 정부를 비판하거나 정부의 정책과 요구를 잘 따르지 않는 기업인들을 손보기 위한 대중적 장치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례는 유일한박사의 유한양행이 이때 정부의 감사와 사찰대상이 되어 온갖 조사와 감사를 당했는데 탈탈 털어도 혐의점이 전혀 나오지 않자 오히려 국세청으로부터 성실납세기업으로 상을 받는 일도 있었다. 

 

1970년대 강력한 정부주도의 경제성장 속에서 친정부 성향을 가진 기업들은 승승장구한 반면 그렇지 않고 정부의 눈 밖에 난 기업들은 고초를 겪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와 다르지 않은 기업정책을 박정희정부도 반복 사용한 것이다. 1970년대 우리나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정부의 정책방향을 잘 따르냐 아니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때로 계속 이어진다.  

 

 

참고문헌

 

20세기 한국경제사 (정태헌, 역사비평사, 2010)

대한민국경제사 (석혜원, 미래의창, 2012)

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돌베개, 20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온라인판)

위키피디아 

 

김창수. (2006).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 기업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 한국언론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511-525.

선혜진. (2004). 사회공헌활동을 통한 우리나라 기업 PR 의 고찰: 기업재단을 중심으로. 언론과학연구, 4(2), 101-138.

이상민. (2016). 한국 CSR 의 역사. 시민사회와 NGO14(1), 93-140.

임광순. (2016). 1970 년대 노동통제전략의 구축과 붕괴: 공장새마을운동의 전개와 정부・ 기업・ 노동자의 대응을 중심으로. 역사와현실, (102), 323-360.

조대엽. (2007). 공공성의 재구성과 기업의 시민성: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에 관한 거시구조변동의 시각. 한국사회학, 41(2),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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