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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anced CSR & ESG

우리나라 CSR의 역사(5)_1990년대_"세계화의 명암"

by Mr Yoo 2020. 7. 19.

국가부도의 날_영화 포스터

우리나라 CSR의 역사 _ 1990년대 

세계화의 명(明)과 암(暗)

 

1988년 서울올림픽

 

1987년 민주화의 높은 파도가 대한민국을 휩쓸면서 국민은 대통령직선제를 얻었고 노동자들은 보다 노동자 중심적인 노조설립과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 세계화의 주요한 기점으로 작용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대통령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대외에 알리겠다는 홍보 목적으로 기업자본의 도움을 받아 1988년 올림픽유치에 성공했다. 전두환정부는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3S(Screen, Sports, Sex) 정책을 적극 실행하고 교복자율화, 두발자유화, 통행금지 해제, 컬러 TV보급 등 국민의 환심을 사는 정책을 펼쳤다.

 

올림픽을 비롯한 스포츠를 정권 홍보 등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흔한 일이다. 로마시대 콜로세움은 로마황제의 철권독재를 미화하기 위한 수단 중에 하나였고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체제선전도구로 아주 잘 활용하였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또한 축구와 월드컵을 이탈리아 민족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한편, 우민화(愚民化)정책으로 불리는 3S정책은 문화예술스포츠 산업을 활성화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고,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은 결과적으로 우리나라가 세계화의 파도에 합류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두환정권은 국민의 환심을 사고 국제 스포츠 대회를 유치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1981년 해외여행자유화 조치를 발표했는데 이는 박정희정권 당시 복잡하고 까다로웠던 여권발급 행정절차를 간소화한 조치에 불과했고 실제 일반인에 대한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루어진 것은 1987년 9월로 45세 이상의 국민은 친지 초청 방문이나 단순 관광목적 등의 해외여행이 가능하게 되었고 1988년 7월에는 30세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이런 규제가 완전히 풀리고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된 시기는 1989년 1월1일이다. 

 

미국 헌츠빌 럭키금성 공장 준공기념 사진

기업의 해외진출과 CSR

 

1982년 10월 럭키금성(현 LG전자)은 국내 기업 최초로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 공장에서 컬러 TV생산에 성공했다. 헌츠빌 공장은 지금도 LG전자 미국생산기지의 중심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어 삼성전자도 1982년 포루투갈에 현지생산법인 'SEP'를 설립하며 해외 진출에 나섰다. 

 

1980년대 들어 미국과 유럽의 자국 보호무역정책이 강화되면서 외국 상품에 대한 선진국들의 수입규제가 심해졌다. 내수 시장이 좁은 우리나라 기업들에게 해외 진출은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 정부에서 외환관리를 위해 수출과 직접 관련이 없는 업종은 해외진출을 자제시키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주로 대기업이 상품을 많이 판매할 수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 시장을 찾아 현지 공장을 세우는 방식으로 기업의 해외진출이 진행되었다. 

 

1980년대 우리나라 기업의 선진국 진출은 무역장벽을 뛰어넘고 생산과 유통비용을 절감하며 선진국 주변 해외시장 개척에 유리한 점 등 경영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이기도 했지만 CSR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CSR은 말 그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기 때문에 기업이 위치하고 경영활동을 하는 국가와 사회의 책임의식 수준을 따라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선진국 시장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선진국의 사회적 책임 수준을 따르는 경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197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국과 일본, 유럽 선진 기업들의 세계화는 1980년대 말 소련의 개혁개방, 독일의 통일, 1990년대 초 중국의 개방정책 등으로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화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시장의 세계 단일화는 글로벌 가치사슬의 세계 단일화와 동시에 진행되었고 가치사슬의 단일화는 선진국, 중진국, 후진국 기업들이 글로벌 스탠다드를 공유하게 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글로벌 차원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 또한 기업의 세계화가 가속되면서부터이다. 선진국 기업들이 자국에서는 인권, 노동, 환경 등의  CSR 이슈를 잘 관리하면서 해외에 진출한 자사의 해외지사나 공장, 협력생산업체에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거나 무시하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CSR의 글로벌 스탠다드가 필요하다는 논의도 1970년대부터 제기되었고 OECD에서는 1977년 "기업은 지속가능한 발전에 기여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기업이 진출한 현지 정치활동에 대한 부적절한 참여를 삼가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한 '다국적기업 가이드 라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기업들 또한 해외에 진출함과 동시에 선진국 글로벌 기업들의 가치사슬안에 포함됨으로써 글로벌 기업들이 요구하는 CSR 수준을 따라가게 되었다.

 

 

두산전자 폴리페놀 유출사고를 보도한 신문들

 

두산 OB 맥주 불매운동

 

두산 OB 맥주 불매운동

 

페놀유출과 환경단체의 불매운동

 

구미공단에 위치한 두산전자에서 1991년 3월14일과 4월22일 두차례에 걸쳐 각각 페놀 30여톤과 1.3톤이 유출된 사건이 일어났다. 유출된 페놀은 대구지역의 상수원으로 유입되어 대구시민 전체가 악취가 나는 수도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1차 유출로 수도물의 페놀 수치가 0.11ppm까지 올라갔는데 이는 당시 우리나라 기준치의 22배, 세계보건기구의 허용치에 110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이후 경찰조사에서 두산전자는 정화비용 500여만원을 아끼기 위해 페놀을 정화하지 않은채 여러차례 고의로 배출한 전적이 들어나 시민들의 불만에 불을 끼얹었다.

 

페놀유출사건은 대구시민을 비롯한 환경단체들의 두산제품 불매운동으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기업을 대상으로한 시민단체들의 감시활동과 불매운동이 이전 보다 강화되고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동아일보는 사설(1991.4.23)에서 "두산은 기업할 자격이 없는 기업으로 문을 닫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당시 두산의 박용곤회장은 여론을 의식하여 회장직에서 사임하였다. 

 

페놀유출사건은 당시 국민들에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단순히 구호로서 선심적 행동이 아니라 실제로 일상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적 문제임을 깨닫는 계기로 작용했다. 또한 기업들도 노사대립, 환경문제 등이 사회전반에 이슈화되고 일반 국민들의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CSR 실천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중앙일보 1994.10.20

 

봉사단 시대 개막

 

우리나라 기업들이 CSR에 대한 실행의 필요성을 인식하긴 했지만, 사회, 환경, 노동 등 경영 전반에 CSR을 적용하기보다는 기존에 해왔던 방식인 '돈'으로 해결하려는 손쉬운 방식을 선택했다. 이는 1980년대 30여개에 불과하던 기업재단 설립이 1990년대 60여개로 두 배 이상 증가한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CSR 경영에 대한 글로벌 스탠다드 또한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은 기부와 자선활동으로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를 조금이나마 누그려뜨리고자 했다.

 

1991년 패놀유출사고 이후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거세진 상황에서 1991년 11월 경실련 산하의 경제정의연구소가 국내 최초로 윤리경영실천을 중심으로 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측정하는 '경제정의지수(KEJI index)'를 발표했다. 이후 국내기업들의 윤리경영실천선언이 이어졌다. 1993년 7월에는 당시 민영화 과정중이었던 공기업 포항제철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국내기업 최초로 윤리강령을 선포하였고, 1994년에는 럭키금성이 사회적 책임과 공정경쟁을 다짐하면서 민간 기업 최초로 기업윤리규범을 발표하였다.

 

삼성은 '우리 사회의 근본을 위협하는 도덕성 상실, 인간성 파괴등 병리현상의 치유에 적극 동참키 위해 그룹 및 계열사별로 「삼성사회봉사단」을 구성, 사회봉사활동에에 전사원이 나서기로 했다'는 언론발표를 하고 1994년 10월 삼성사회봉사단을 설립했다. 삼성사회봉사단은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된 공익재단이 아닌 기업내 내부조직으로서 공익활동을 하는 국내 최초의 '기업사회공헌부서'로 기록에 남게 되었고 이후 국내기업의 봉사단 시대의 막이 올랐다.

 

 

성수대교 붕괴 1994. 10.21 

     

삼풍백화점 붕괴 1995.6.29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1994년 10월21일 등교시간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연이어 발생한 1995년 6월29일의 상품백화점 붕괴는 '이윤추구'를 사람의 목숨보다 우선시한 기업들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이어 1995년 11월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폭로되면서 박정희정권시절부터 이어져 온 불법정치자금 조성과 정경유착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기업들은 이번에도 재빠르게 대응했다. 1996년 2월 전경련은 일본 경단련의 기업행동헌장을 모방한 기업윤리헌장을 발표하였고 현대그룹을 비롯한 국내 대표기업들은 윤리경영실천을 앞다투어 선포하였다. 

 

그러나 경영전반의 건정성을 확보하려는 근본적인 CSR 대책을 실행하지 않고, 임기응변식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방식, 또는 앞으로 잘하겠다고 말만으로 떼우는 방식은 국민의 반기업 정서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기업과 기업사회공헌에 대한 사회 불신을 점점더 키우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중앙일보 1997.11.22
MBC 뉴스 1997.11.20

                

대우그룹 해체 개요
1997년 기업부도 

 

준비되지 못한 세계화의 교훈 IMF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로 이어진 32년간의 군부통치를 마치고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김영삼대통령은 "신경제 5개년 계획(1993~1997년)"을 세우고 통제와 압박에서 벗어난 경제와 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이를 위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에 장애가 되는 각종 규제를 완화하여 민간의 자율성을 높이는 각종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중에서도 단기간안에 문민정부의 성과를 들어내기 위해 서둘렀던 OECD 가입은 준비되지 못한 세계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OECD 회원국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외환거래의 자유화를 보장하는 IMF 8조의 실행과 국제수지상의 이유를 들어 수입제한을 하지 않는다는 의무를 지기로 하는 GATT 11조 실행이 되어야 한다. 즉, OECD 가입을 위해서는 외환시장의 개방과 무역 장벽의 폐지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1988년 11월에 IMF 8조, 1990년 1월에 GATT 11조를 채택하였지만 국내경제 규모와 외환시장 안정성을 고려할때 OECD 가입은 이르다는 의견이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경제학자들 대다수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김영삼정부는 선진국진입이라는 샴페인을 터트리고 싶어했고 1996년 12월 OECD에 서둘러 가입했다.

 

OECD 가입으로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신용도가 올라감에 따라 우리나라 금융기관들과 기업들은 예전보다 낮은 금리와 좋은 조건으로 외국은행에서 달러를 빌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김영삼 정부의 반강제적인 환율안정화정책에 따라 환율이 낮아지면서 외화대출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자기자본이 얼마되지 않은 한보나 대우와 같은 기업들이 해외에서 막대한 자금을 끌어들여 문어발식 경영확장을 신나게 하다가 브레이크가 걸렸다. 한보는 당진제철소(현 현대제철)를 건설하던 중 대금을 갚지 못해 1997년 1월 부도선언을 했다. 당시 한보가 금융기관들로부터 빌렸던 돈은 5조 559억원이었고 이는 고스란히 금융기관의 부실로 이어졌다.

 

연이어 1997년 3월 태국발 외환위기가 터졌고 아시아 신흥경제국에 대한 신용도가 급락하던 상황에서 한국의 한보사태를 주시하던 외국 금융기관들은 앞다투어 한국에서 돈을 빼 나갔다. 순식간에 달러 환율이 두 배로 치솟았으며 외화대출을 했던 기업들이 환율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줄줄이 도산했다. 정부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외환 보유고는 바닥이 났고 우리나라 정부는 1997년 11월 22일 IMF에 구제신청을 하게 되었다. 한때 재계 2위를 기록했던 대우그룹도 환율의 벽을 넘지 못하고 1999년 7월 부도처리 되었다.

 

1997년의 외환위기는 많은 수의 기업들을 도산시켰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 30대 기업집단 중 절반에 가까운 14개 기업이 도산, 법정관리, 화의 또는 금융기관에 의한 재무구조개선작업(workout)의 대상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기업 오너가 바뀌게 되었다. IMF 당시 기업사회공헌은 당연히 축소되었다. 전경련 자료에 따르면 1996년 전경련 회원사의 사회공헌 집행액은 평균 33억 3,400만원이었으나 1998년 평균 집행액은 22억 6,300만원으로 32.1% 나 감소했다.

 

 

 

 

동아일보 1998. 1. 21

 

CSR의 새로운 국면

 

외환위기는 우리나라 CSR에 있어서도 일대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특혜나 부패, 정경유착, 투기, 탈세, 그리고 부실경영과 같은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사회전체에 확산되었고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 중에 하나로 재벌의 방만한 경영이 지목되면서 재벌경영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다. 

 

특히, 외환위기의 가장 큰 사회적 이슈는 노동시장의 유연화, 즉 구조조정문제였는데 당시 최고의 CSR을 실천하는 기업은 해고나 감원을 하지 않고 노동자의 고통을 분담해주는 기업들이 손꼽히게 되었다. 한 예로 유한킴벌리가 3조 3교대로 운영하던 공장을 4조 3교대로 바꾸는 등 기업과 노동자들이 함께 고통을 분담하며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통해 CSR이 단순히 기부나 자원봉사가 아니라 기업경영 그 자체에 있음을 실제로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 CSR은 또 다른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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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상민. (2016). 한국 CSR 의 역사. 시민사회와 NGO14(1), 93-140.

 

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돌베개, 2014)

대한민국경제사 (석혜원, 미래의창, 2012)

브래테니커 백과사전

20세기 한국경제사 (정태헌, 역사비평사, 2010)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해냄, 2020)

위키피디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온라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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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는 다음 주에 이어가겠습니다. 4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섰더니 몸이 말을 잘 듣지않아 정비를 했습니다. 평생 처음 병원 밥도 먹어보고 꼼짝말고 누워만 있으라는 의사 명령에 따라 누워만 있다가 지난 주엔 블로그도 못쓰고 지나갔습니다. 다행히 수술도 잘되고 점차 회복되고 있습니다. 걱정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건강이 최선입니다.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블로그 찾아 주셔서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

 

Balanced CSR 유승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