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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anced CSR & ESG

우리나라 CSR의 역사(6)_2000년대_미국식 CSR 따라하기

by Mr Yoo 2020. 7. 25.

자유의 여신상과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 

우리나라 CSR의 역사 _ 2000년대

미국식 CSR 따라하기 

 

복지국가 입문과 민간기부 활성화

 

IMF금융위기를 국민의 힘으로 극복해보자는 금모으기 운동이 한창이었던 1998년 2월25일 김대중대통령이 취임했다.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 정부" 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외환위기 극복,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복지국가의 병행 발전, 남북화해와 협력' 을 국가의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았다. 

 

이중, 1999년 9월 제정되어 2000년 10월부터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국민의 생존과 최소 생계를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을 법적으로 명시한 것으로 우리나라가 실질적인 복지국가의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김대중정부는 국민복지증진을 위해 민간 기업의 참여와 역할도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1998년 11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특별법에 의해 설립되고 명예회장을 대통령 영부인 이휘호여사가 맡음으로써 청와대는 정부복지정책의 사각지대를 민간영역이 보완해 주기를 기대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이하 모금회)의 설립은 우리나라 기업사회공헌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역할을 했다. 모금회 설립 이전에는 방송국, 언론사, 사회복지기관, 민간단체, 지자체 등이 재난재해 발생시나 연말연시에 그때 그때 각자 성금모금을 했고 모아진 성금들이 제대로 쓰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정부는 국민성금모금 채널을 일원화하여 모금 및 사용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자체적으로 모금활동을 할 수 없는 소규모 복지시설들에게 국민성금이 골고루 배분되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모금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기업 기부금 모금 창구를 일원화함으로써 기업 기부가 외부에 투명하게 공개되기를 바랬다.

 

 

출처 :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대통령과 정부각료, 국회의원, 방송 진행자들이 모금회를 상징하는 '사랑의 열매' 배지를 왼쪽 가슴에 달고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기업들의 기부금 액수가 주요 방송과 신문에 공개되면서 기업들은 자의반 타의반 모금회에 이웃돕기 성금을 기부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모금회의 설립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기부는 어쩌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하는 것이 아닌 매년 일상적으로 해야하는 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업기부의 일상화(기업내부에서는 이를 '준조세화'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우리나라 기업사회공헌의 전체 파이를 크게 키우는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으며 특히 기업들이 사회공헌에 대한 관심과 전문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공동모금회는 기업 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한 모금 전략으로 '지정기부금'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는 기업이 기부한 기부금 중 일정비율(2019년 현재 50%)을 기업이 원하는 복지사업이나 단체에 지정해서 기부할 수 있는 제도이다. 대기업들의 경우 모금회에 연간 수십, 수백억이 넘는 기부금을 내기 때문에 이 중 지정기부금을 (기업에 유익이 되도록) 잘 활용하는 일(임직원 봉사활동, 기업 이해관계자, 이해지역 관리, 기업공익연계 마케팅 등)을 위해서는 전문성을 가진 기업내 사회공헌 전담조직이나 인력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모금회의 설립은 기업내 사회공헌조직이나 전담인력의 자리가 만들어지는 중요한 계기 중에 하나가 되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사진출처 : 연합뉴스

 

연탄과 김장김치 전성시대

 

1994년 삼성사회봉사단 설립 이후 다른 대기업들도 봉사단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때마침 IMF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주춤했다가 2000년대 초반 포스코, SK, 한화, LG, 현대자동차 등 주요 기업들이 사내 사회공헌조직을 만들고 임직원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사내 사회공헌조직의 핵심역할은 임직원봉사활동과 기부금 사업의 기획과 실행이었다. 기업 임직원 봉사활동은 대개의 경우 기업 본사와 지방사업장, 공장 인근의 사회복지시설을 찾아가 간단한 일손을 돕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기업사회공헌이 활성화되면서 주요 방송과 신문들은 기업들의 기부금 액수와 임직원 봉사활동 참여실적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업사회공헌 담당자나 조직이 대부분 홍보팀에 속하게 된 가장 크고 중요한 이유는 기업이 사회공헌을 홍보활동 정도로 여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 언론사의 적극적인 사회공헌 취재에 빠르고 적절하게 대응, 응대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지금도 몇몇 기업은 그렇지만 사회공헌부서의 KPI 중에 하나가 주요 언론에 사회공헌기사를 연간 몇회 싣는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회공헌담당자들은 주요 방송사와 언론사의 기자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해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방송과 신문에 실리기 좋은 '그림과 스토리가 되는' 사회공헌사업이나 임직원봉사활동을 선호하게 되었다.

 

방송국 PD와 신문기자들이 원하는 '그림과 스토리'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공헌사업과 봉사활동의 대상자가 되도록이면 어렵고 불쌍하고 소외되어야 했다. 기업 사회공헌담당자들은 이런 대상자를 찾기 위해 주로 공모사업(이중 대부분은 공동모금회 지정 기부금을 활용했다)을 활용했고 기업의 기부금을 받기 원하는 사회복지기관이나 민간단체들은 자신들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상자들의 어려움, 불쌍함, 소외됨을 호소하고 증명해야만 했다. 

 

2000년대 중후반 기업 사회공헌 공모사업이 증가하면서 '기업사회공헌 제안서 잘쓰기' 라는 특강이 사회복지시설 종사자를 대상으로 여기저기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심지어 공모사업 제안서를 대신 써주는 브로커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특강의 내용은 대개 이랬다. "눈에 확 들어오는 사업명 만들기" , "대상자들에 대한 차별점(불쌍하고, 어렵고, 소외되고..) 부각시키기", "감동적인 스토리와 그림 만들기" 등이다. 

 

날씨가 추워지는 연말이 되면 하루가 멀다하고 전국에서 연탄을 나르고 김치를 만드는 행사가 열렸다. 그 행사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업 로고가 크게 새겨진 봉사조끼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오기 위한 포즈로 연탄을 나르고 김치를 만들었다.

 

전국에서 매년 수백, 수천회 반복되는 김장김치만들기 행사와 연탄나르기 행사는 실제 필요에 의해서 실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기업의 사진찍기와 언론보도자료배포 때문에 필요도 없는 행사가 진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2010년에 스크랩한 자료를 보면 OO시 사회복지시설협의회에서 김장김치만들기 행사가 실제 현장에서 필요하냐는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응답자의 63%가 "필요에 비해 김장김치행사가 과도하게 진행되어 자원낭비가 심하다" 라고 답했다.  

 

2000년대 기업 기부와 임직원봉사활동이 크게 확대되면서 그동안 여러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민간복지사업과 시민단체 활동이 활성화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사회공헌사업과 임직원 봉사활동이 진행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미지 출처 : 구글

 

미국식 CSR 따라하기

 

기업로고가 크게 프린트된 조끼나 티셔츠를 입고 수십명이 모여 (짧고 간단한) 봉사활동을 한 후에 역시 기업로고가 크게 프린트 된 현수막을 들고 크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화이팅을 외치며 사진을 찍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사회공헌, 임직원봉사활동의 모습은 어디에서 왔을까.. CSR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의 CSR이 미국 기업의 CSR과 많이 닮았다고 분석한다. 

 

ISO26000의 집행위원장이자 EU지속가능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마틴 로이 라이터 교수는 2015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 CSR 포럼에 참석하여 '한국에서 CSR이 ISO26000에서 제시하고 있는 거버넌스, 인권, 노동, 환경, 소비자책임, 공정운영(윤리경영), 사회공헌 등 기업경영 전체의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기부와 임직원봉사활동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이는 미국식 CSR을 따라갔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그 포럼에 참석했던 나는 그날의 발표를 이 블로그에 남겼다.

 

미국식 CSR의 도입은 우리나라에서 기업사회공헌 시작을 주도했던 대기업들의 미국 시장 진출과도 연관성이 높다. 1980년대부터 미국에 생산기지를 확대하던 대기업들은 1990년대 미국 기업들이 활발히 진행했던 공익연계마케팅(CRM_대표적으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의 자유의 여신상 복원 프로젝트), 전략적 사회공헌, 임직원봉사활동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 이행을 기업의 목줄을 쥐고 있던 정부의 눈에만 벗어나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던 방어적이고 수동적 차원에서 벗어나 미국 기업들처럼 사회공헌을 기업 가치 제고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경영전략으로 이해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잘알다시피 미국은 민간기업의 경영에 대해 정부가 가능하면 개입하지 않는 것을 '미국 정신, 미국 스타일' 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는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재임 이후 미국의 주류 경제학이 된 신자유주의에도 부합된 것이다. 따라서 기업경영에 직접 연관되는 인권, 환경, 노동, 소비자책임, 공정거래, 윤리경영 등은 중앙정부가 법으로 관여하기 보다는 기업 자율에 맡기거나 주정부의 권한으로 두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미국에서 CSR은 각 개별 기업의 이해 정도에 따라 실천 범위가 크게 차이나며 그나마 CSR에서 공통적이고 적극적인 부분이 기업기부와 임직원 봉사활동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CSR을 기업사회공헌으로 이해한 배경에는 일본의 영향도 있다. 일본의 경우 1990년대 일본기업들이 미국시장을 휩쓸면서 미국기업의 경영방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사회전반에서 CSR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본은 2003년을 'CSR 경영의 원년'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경단련(경제단체연합회, 우리나라의 전경련)이 2003년에 CSR 비전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때 경단련은 CSR을 일본어로 해석하면서 미국 기업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기업자선(corporate philanthropy)을 사회공헌으로 번역했고 CSR을 기업의 사회공헌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전경련으로 전해지면서 CSR은 기업사회공헌을 의미한다로 굳어지게 되었다. 실제 미국이나 유럽 기업의 CSR담당자를 만나 기업사회공헌(corporate social contribu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거의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다. 대신 기업자선이라고 하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한양대학교 사회학과 이상민교수는 연구논문에서 미국과 일본 기업의 사회공헌 방식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기업으로 삼성그룹을 언급했다. 삼성은 1990년대부터 삼성경제연구소(SERI)를 중심으로 CSR에 대한 구체적인 논리와 이념 개발에 나섰지만 이 과정에서 광의(廣意)의 개념보다는 미국과 일본 기업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회공헌과 윤리경영에 집중했다. 

 

일본 경단련의 사회공헌개념을 답습한 전경련과 미국과 일본 기업들의 사회공헌을 벤치마킹한 삼성그룹의 영향으로 이후 국내 다른 대기업들 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내부적인 윤리경영과 대외적인 사회공헌활동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결과 우리나라 기업들은 1990년대 말부터 EU를 중심으로 경제, 사회, 노동, 인권, 환경 등 다양한 주제로 확산되고 있었던 기업의 사회적 책임 논의에서 은근슬쩍 멀어지게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의 주요 시장이 미국과 일본이고 벤치마킹 대상이 거의 모두 미국과 일본기업이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GRI 로고

 

 

지속가능보고서 발간 시작

 

1980년대 듀폰을 비롯한 미국 주요 화학기업들이 소비자 및 환경단체들과 벌인 기나긴 민사소송과정의 결과 금전적 피해보상, 환경보호 정책실행과 함께 매년 제3의 전문가가 검증한 환경영향평가 보고서를 공개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받게 된다. 이와 관련된 영화<다크 워터스>가 얼마전 개봉되었다.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담당자라면 꼭 봐야할 영화이다. 아무튼 1980년대부터 발간된 기업의 환경보고서는 1990년대 미국과 유럽의 주요 투자기관과 은행들이 기업의 리스크를 평가하는 자료로 활용하면서 글로벌 대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발간하는 분위기로 확산되었다.

 

1997년 유엔환경프로그램(UNEP)의 지원을 받은 미국의 민간단체인 환경책임경제연합(Ceres)과 텔레스연구소는 기업의 환경영향평가보고서를 사회영역으로도 확대하는 글로벌 기준을 만드는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것이 현재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의 가장 대표적인 가이드라인인 'GRI 스탠다드'의 시작이다. 

 

이후 1999년에 지속가능보고서 가이드라인 시범 초안이 발표되었고 2000년에 공식버전 초안이 그리고 2002년 UNEP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 버그에서 개최한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세계 정상회의'에서 정식버전이 공개되었다. 이후 GRI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본부를 둔 글로벌 비영리 단체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GRI는 버전 4.0이 나온 이후 2016년 지금의 GRI 스탠다드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된 상태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과 유럽의 자동차, 건설회사에 수출을 해야하는 포스코와 미국, 유럽 노선 취항이 많은 대한항공이 1995년 환경보고서를 발간한 것이 최초이며 이후 2003년 현대자동차, 삼성 SDI, 한화석유화학(현 한화케미칼), 대한항공이 지속가능보고서 타이틀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2002년 UNEP 정상회의에서 GRI의 정식버전이 공개된 것과 시기를 같이한다고 보면 된다. 

 

지속가능경영에서 앞서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이 지속가능보고서를 기업경영과 지속가능성을 통합/결합하는 주요 도구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 기업들의 경우 지속가능보고서를 대외평가용 또는 미국과 유럽의 투자기관, 은행, 거래기업, 유통채널의 제출 요구 때문에 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글로벌 벨류체인이 속하지 않은 내수기업이나 증권거래소의 ESG평가를 받지않는 비상장기업은 경영진이 지속가능보고서 발간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지속가능보고서 발간은 현재 100개 기업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CSR이 곧 사회공헌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은 안타깝다. 더구나 이제는 미국과 일본의 기업들도 더이상 CSR=사회공헌이라는 편협한 인식을 벗어나 지속가능경영에 통합된 CSR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아직 2000년대 초반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 더욱 머리가 아프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하면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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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찾아주셔서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2010년대 CSR의 역사로 또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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