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사회공헌, 거버넌스(governance)의 중요성
ISO26000 한 가운데에 조직과 의사결정이 있는 이유
기업을 비롯한 모든 사회조직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국제표준기구 가이드 라인 ISO26000을 보면 '1)인권, 2)노동관행, 3)환경, 4)공정거래, 5)소비자 이슈, 6)지역사회 참여와 발전'이라는 6가지 핵심 주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조직(Organization)과 의사결정(governace)이 자리잡고 있죠. ISO26000의 배치와 형상을 가만히 보면 '조직과 의사결정'이 마치 '바퀴의 축'이고, 나머지 6가지 주제가 축을 중심으로 동그란 바퀴의 외형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기업을 포함한 어떤 조직이든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실천도 나름대로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조직과 의사결정'이라는 '축'이 원칙대로 올바르게 자리잡고 움직여야 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바퀴축이 비뚤어진 자동차는 핸들을 아무리 바르게 잡아도 똑바로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기업사회공헌을 포함한 CSR이 우리나라 기업에서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ISO26000의 집행위원장 마틴 로이라이터 교수는 몇년 전 국내에서 열린 CSR 컨퍼런스에 참가해 한국기업의 '지배구조와 의사결정방식'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CSR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은 단계라고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컨퍼런스 마지막에 토론 순서에서 '한국기업의 CSR 문제점과 한계, 개선방법'에 대해 청중의 질문을 받은 마틴교수는 '한국 재벌기업의 제왕적 의사결정구조는 투명하고 공정한, 그리고 책임있는 의사결정을 하기에 매우 어려운 구조라고 하였습니다. 회장이 모든 의사결정구조에 정점에 있고, 그 누구도 회장의 의사결정에 반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사회책임영역이라고 한들 회장의 사견에 반하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최순실사건을 모르는 건가?
몇달 전 만난 L기업의 사회공헌팀 B과장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회장 사모의 여동생이 음대교수인데 이 교수가 교내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어해서 형부인 회장에게 요청을 했고 회장은 사회공헌팀에게 지원방안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음대교수를 찾아가 오케스트라 구성계획과 예산을 좀 알려달라고 하니, 이미 회장님과 다 얘기가 끝났기 때문에, 현금 5억을 자신의 통장으로 넣어주면 된다고 했답니다.
회사규정상 그럴 수 도 없을 뿐더러, 학교도 아닌 개인교수의 통장으로 현금 5억을 넣어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회장 사모에게 전화를 걸어 한숨을 푹푹 쉬며 좋은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데, 너무 까다롭게 군다며 하소연을 하고 오케스트라 하나 만드는데 5억이면 아주 싸게 먹히는 거라며.. 난리법석을 떨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올바른 B과장은 확답을 하지 않고 회사로 돌아왔는데, 위에 상무가 부르더니 '회장님이 지시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방법을 만들어야지, 회사원칙때문에 안된다고 거절하고 오면 어떻게 하냐고, 회사 그만 두고 싶냐고..' 막 몰아부쳤답니다. 정말 사표를 던질까 하다가 어린이 집 다니는 두 아들이 생각나서 꾹 참고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팀장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B과장님네 회사는 신문도 안보나봐요... 최순실이 뭣 때문에 지금 감옥에 있는데, 회장님은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모르시는 가봐요?" 라고 그냥 농담반 진담반으로 받아 넘겼습니다. 며칠 뒤 B과장은 그 교수로부터 악기목록을 받았고 악기를 회사 돈으로 구입해 그 대학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악기는 그 교수의 제자 부모가 운영하는 악기점에서 시세보다 10~20% 비싼 값으로 구입했다고 합니다.
비선실세... 기업사회공헌에도 비선실세들이 많습니다. 제가 일했던 회사에서도 종종 겪었던 일입니다. 회장의 친구, 학교동창, 교회 목사, 사모의 동생이나 친구 등등.. 무슨 회사가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버젓이 상장된 회사에서 이사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공헌예산은 회장, 사장, 고위 임원들의 쌈짓돈이 되는 경우를 종종봅니다. 그리고 그런 일 때문에 기업사회공헌담당자들이 사표를 꺼냈다 집어넣다 하는 일도 종종 듣고 있습니다.
자기회사인데 회장 맘대로 후원도 못하나? 반문할 수 있겠지만, 우선 상장회사라고 하면 회장 개인의 회사가 아니니까, 중요한 의사결정은 이사회를 통해 결정하거나 정당한 의사결정 구조를 거쳐서 실행해야 합니다. 더구나 친인척과 관련된 지원은 누가 보더라도 회사 돈으로 하면 안되는 겁니다. 진짜 하고 싶으면 회장 본인 돈으로 하면 되는 겁니다. 처제 학교에 악기 사주는 것을 왜 회사돈으로 합니까? 이래서는 안됩니다.
최순실사건 이후 몇몇 큰 기업들은 '사회공헌예산심의위원회'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서 일정정도 금액이 넘어가면 공정하고 투명한 기부와 후원을 위해 공식적인 심의절차를 거친다고 합니다. 반갑기도 하지만 많이 늦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위원회는 과연 회장의 지시를 거역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회장의 사적인 지시를 절차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됩니다. 일부 기업재단들이 종종 그러고 있는 것 처럼 말입니다.
개인의 취향은 집에 가셔서 혼자 있을 때....
정말 지어낸 이야기 같은 일이지만.. 경기도에 위치한 K기업의 김장행사 이야기는 거의 끝판왕입니다. 매년 김장행사를 하는 M사는 임직원 가족봉사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임직원 가족봉사단의 단장은 회장 사모가 맡고 있습니다. 회장 사모는 자칭 요리연구가인데, 일반인의 입맛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많이 싱겁고 많이 쓴 것을 좋아한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김장행사를 할 때 김장양념이 싱겁고 쓰다고 합니다. 소금을 적게 넣는 대신에 효소 같은 것을 많이 넣어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잘 못먹을 정도라고 하는데, 그 사모는 그것이 건강에 좋다고 꼭 양념을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몇년을 그렇게 싱겁고 쓴 김치를 만들어 복지관과 복지시설에 주었더니, 어떤 노인 복지관에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M사의 김장김치가 어르신들 입맛에는 잘 안맞는 것 같아요.. 올해 김장행사의 양념은 사다가 하면 안될까요?" ..... 결과는 당연히 안되는 걸로....
기업사회공헌 예산은 쌈짓돈이 아니다. 기업사회공헌은 개인의 취미생활이 아니다.
박근혜 前대통령과 최순실은 국가와 국가의 권력을 사유화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재판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미 촛불혁명이 증명한 것처럼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사기업은 오너의 것이라고 주장 할 수 있겠지만 회사의 공금을 가지고 사적인 영역에 무단으로 사용하면 횡령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회장이 아니라 다른 임직원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공헌예산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회사에서 가만히 놔둘까요? 당장 집에 가야 할 것이고.. 회사로부터 손해배상소송을 당할 수 도 있는 일입니다.
친인척과 개인적인 이해관계자를 돕고 싶으면 회장 본인 주머니에서 꺼내 도우면 됩니다. 회장의 취미생활과 회장 사모의 사교활동은 본인 월급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회사의 사회공헌예산을 건드리면 안되는 겁니다. 미국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기부문화에서 우리보다 앞선 미국은 아무리 기업의 오너라도 개인적인 후원은 개인 돈으로 합니다. 회사 돈으로 후원 할 경우에는 크고 중요한 것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치고 작은 것이라도 그 회사의 사회공헌 계획과 원칙에 따라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하려고 노력합니다(참고: 지역과 상생하는 기업 핵심전략/닉 라킨, 베로니카 슈벨/생각비행)
아직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회장, 사장의 지시가 법이나 도덕, 윤리, 회사의 사규보다 앞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법, 도덕, 윤리, 회사의 사규를 어기더라도 회장, 사장의 지시를 받들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일을 해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을 능력으로 인정받습니다. 그것이 싫으면 그 회사를 떠나야합니다.
기업사회공헌예산이 회장, 사장, 고위 임원들과 주변인들의 쌈짓돈이 되고, 회장 주변인의 개인 취향이나 자문을 빙자한 비선실세의 개입으로 이상한 방향, 생뚱맞은 사업들로 흘러가는 모습들을 자주 목격하고 들으면서.. 이런 상황에서 기업사회공헌담당자들이 어떻게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괘감, 허탈감이 들기도 합니다.
국세청 자료에 의하면 2016년 한해동안 우리나라 기업들이 쓴 접대비는 10조였습니다. 기업사회공헌으로는 3조를 썼습니다. 술먹고 밥먹고 골프치고 여행보내주는 접대비의 1/3도 되지 않는 기업사회공헌 예산에 잡상인도 너무 많고 파리떼도 너무 많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게 우리나라 기업사회공헌의 현실입니다.
기업사회공헌, CSR을 잘하고 싶다면.. 이것에 대한 회사내 의사결정구조와 조직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이 분야에서 앞선 기업들이 기업내 지속가능위원회, 사회책임경영위원회 등의 별도의 조직을 구성하고 내외부의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지속적인 의견을 청취하며 모니터링하게 해서 투명하고 공정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CSR의 조직과 의사결정이 바른 방향을 잡아야 다른 모든 것들도 올바른 방향을 향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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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글은 제 얼굴에 스스로 침 뱉는 내용이지만.. 기업사회공헌 뒷편 그늘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서 쓴 글입니다. 다음 주엔 좀 더 희망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블로그 찾아 주셔서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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