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사회공헌담당자의 기본
BASIC
검정 비닐봉지..
십수년 전 '그룹홈'에서 생활교사를 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토요일 오후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그때는 주 5일제가 아니었음..^^;;) 전화가 왔습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큰 웨딩홀인데.. 결혼식 하객이 예약에 절반도 오지 않아서.. 음식이 100인분 이상 남았는데.. 가져갈 수 있겠냐는 전화였습니다. 그때는 아동청소년그룹홈이 아동복지법상 복지시설이 아니어서.. 정부지원도 없고, 외부의 후원도 별로 없을 때라.. 라면 한 개가 아쉬울 때였습니다. 당연히 받으러 간다고 하고, 당시 우리 단체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던 십년이 넘은 털털이 다마스를 끌고 ..오늘 저녁은 아이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한아름 안고 웨딩홀로 갔습니다.
그런데.. 웨딩홀 주방에서 절 기다리고 있던 건... 커다란 검정비닐봉지(일반적으로 식당에서 음식물 쓰레기 버릴때 사용하는..) 열댓개... 검은 봉지들 위에는 포스트 잍으로 '친절'하게도.. '김밥'.. '과일'..'떡'..'빵'.. 등의 메모가 붙어있었습니다. 그것들을 차에 싣고 오면서.. 잠시..고민 했습니다... '이상태로 다른 그룹홈 선생님들(그때 제가 일하던 단체에는 그룹홈이 7개가 있었습니다.)이나 아이들에게 전해주면 받는 사람 기분이 어떨까....?'.. 짧은 고민 끝에 동네슈퍼에 들러 일회용 도시락을 여러개 샀습니다. 그리고.. 그룹홈 사무실에 와서.. 검정봉지에 담긴 많은 음식들 중에 짓눌려서 찌그러지고 망가진 것들을 골라내고(거의 2/3이상..) 가급적 상태가 괜찮은 것들로만 골라서 종류별로 도시락에 다시 담아.. 그룹홈에 가져다 드렸습니다.
최신 MP의 행방..
역시, 그룹홈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한 대기업에서 사회공헌활동을 한다고.. 그룹홈 아이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때는 기업사회공헌 초창기라 기업들이 어떻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해야하는지 잘 모를 때였습니다. 그룹홈 아이들과 생활교사 서른여명을 초청하여 롯데월드에서 잘놀게 해주고, 근처 호텔 뷔페식당에서 저녁 빵빵하게 먹이고... 여기까지는 아주 좋았는데.. 프로그램을 마치고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그 회사의 사회공헌팀장님이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선물을 풀어본 아이들은 말 그대로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 당시 10여만원이 훨씬 넘는 고가의 최신 MP3가 선물로 똭! 그때 그룹홈 아이들 한명당 한달 생활비가 10만원이 채 안되는 상황이었고, 아이들 용돈도 한달에 만원정도 였는데.. 그런 고가의 선물을 받게 되었으니....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대부분의 아이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MP3를 팔았고...(물론 대부분 잃어 버렸다는 핑계를 대면서).. 덕분(?)에 한동안 아이들이 꽤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36사이즈 카키색 면바지 50벌..
옷 회사인 E-그룹에서 일할 때의 일입니다. 당연히 옷을 나눠주는 사회공헌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입사 초기의 일인데.. 전화를 한통 받았습니다. "여기요.. 여기는요.. 여자 꼬마애들 서른명이 사는 **복지원인데요.. 옷을 잘못보내주신 것 같은데요.. 36사이즈 카키색 면바지 50벌 한박스가 왔는데.. 입을 사람이 없어요... 이거 어떻하면 좋아요.." .. 그때까지만 해도.. 창고에 쌓여있는 제품을 복지시설 리스트를 가지고 물류센터에서 박스채로 막 보내던 그런 때 였습니다.
송편이 왜 오늘 오니?
부끄럽지만.. 며칠 전 우리 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추석 명절을 맞아 회사 근처의 노인복지관 어르신들에게 송편을 선물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행사를 준비하는 기간에 늦은 휴가를 다녀오느라 직접 챙기지 못하고, 행사 전날에서야 실무자들과 함께 행사준비회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담당 실무자는 여러차례 진행한 행사라.. 별다른 것 없이.. 지난 해와 동일하게 소박하게 진행할 것이라 이야기했고.. 저도 그리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준비 시간표에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행사는 내일 점심인데.. 송편이 오늘 저녁에 도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행사가 내일 점심인데.. 송편이 왜 오늘 오니?" ... "예? 아! 그거요... 작년과 재작년에 행사 당일날 아침에 송편을 받으니까.. 준비하기가 바쁘고.. 정신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오늘 저녁에 사무실에 갖다 놓으면.. 내일 행사하기 편할 것 같아서요..." ...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동안 번거롭고 준비하기에 바빴지만... 왜..아침에 찐 송편을 가지고 행사를 했을까? ".... "아.. 그거야.. 따뜻한 송편이 맛있으니까요.."... "그렇지... 우리 실무자들이 좀 번거롭고 바쁘더라도... 형편 어려운 어르신들이 일년에 한번 드실까 말까한 추석 송편을 맛있게 드시게 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 "뭐... 제 생각에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어르신들 집에가서 전자렌지에 데워드셔도 될 것 같고..."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 어르신들은 다음 날.. 아침에 찐 맛있고 따끈한 송편을 드실 수 있었습니다.
기업사회공헌담당자의 기본...
기업사회공헌을 잘 한다는 것을 '기업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균형있게 창출하는 것'으로 막 어렵게 말하고, 전략적 사회공헌이다. 기업의 가치사슬과 핵심역량과 연계하고 통합해야 한다. 임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재능을 활용해야 한다. 파트너십을 통해 NPO, NGO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 뭐..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막 잘난체하고 그러지만... 실제...더 중요하고 기본인 것을 잊고 일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며칠 전 송편 일처럼.. 주는 기업(실무자)의 입장만 생각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사회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 담겨진 음식을 주어도 감사하며 받아 먹어야 하고... 사이즈와 성별이 맞지도 않고, 게다가 50벌 전부가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받아서 입어야만 하고... 복지관을 이용하는 어르신들은 식어서 딱딱하게 굳은 송편을 받아도 '아이구..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라고 해야 되는 줄... 그래도 되는 줄로.. 기업의 사회공헌담당자들은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반대로.. mp3의 경우처럼... 기업입장에서는 잘 해주는 것이라고, 고가의 선물을 주었지만... 받는 아이들의 형편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과한 선물이 오히려 아이들이 거짓말을 해야하는 상황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고가의 mp3가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아주 사소한 생필품과 학용품, 용돈이었습니다.
기업사회공헌이란 일을 하면서,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하면서 시시때때로 우리(기업)쪽의, 우리 실무자들의, 우리 임직원들의 효율성과 편의성, 우리의 욕구와 필요, 기대가 먼저일 때가 많습니다. 기업사회공헌의 가장 낮은 단계라고 하는 단순지원사업에서 조차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상황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보다 이해관계자가 복잡한.. 보다 프로세스가 번거로운 사업에서는 '기업우선, 실무자 편의성 중심'이 더 노골적이고 일상화 될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업사회공헌, 기업사회공헌실무자의 갑질은 그렇게 '계획하고 의도된 것'이라기 보다는 기업사회공헌 실무자 개개인의 '자기 편의(便宜) 우선적인 업무처리방식'이 하나씩 둘씩 누적되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혹자는 "공짜로 주는 것도 감지덕지지.. 뭘 이렇게 따지냐..?" 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받는 쪽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달라고 했나? ".... 기업사회공헌실무자들은 늘 '우리는 주는 사람.. 그래서 저들보다 좀더 우월한 사람... 그래서 우월한 우리생각, 우리방식대로 하는 것이 좀더 나은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무의식적으로 그런 우월감을 가지고 일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는 존경하는 분에게 선물할 때에는 여러번 고민하고, 주변에 물어보기도 하고, 선물을 받는 상대방의 취향이나 형편, 관심사까지 고려합니다. 선물을 내가 주기 편한 방식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쓸모 없는 것을.. 버리듯이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선물과 기업사회공헌의 후원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기업의 유휴자원을 필요한 곳에 지원하는 것이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며.. 기업사회공헌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과 프로세스이긴 하지만... 그 과정을 담당하는 기업사회공헌담당자들이 '주는 것' 자체에 '매몰'되어 버리면 '주고도 욕먹는 일'을 하게 됩니다. 제가 기업사회공헌실무자를 하면서 철칙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주고도 욕먹는 일을 하지말자" 입니다.
기업사회공헌의 기본 중에 기본이 제가 일하는 팀에서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을 며칠 전에 겪고나니... 그동안 이 블로그에서 잘난체 한 것이 정말 많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그리고, 깊이 반성했습니다. 어쨌든... 따끈하고 맛있는 송편을 드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기본..... 기본만 잘해도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블로그 찾아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추석 즐겁게 잘 보내십시요...
* 이미지는 구글에서.. 땡큐 구글...
'Balanced CSR & ES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경유착과 기업사회공헌.. (0) | 2016.09.25 |
---|---|
기업사회공헌 & CSR 담당자의 공부.... (0) | 2016.09.17 |
전략적 CSR, 전략적 기업사회공헌의 네가지 관점...(2) (0) | 2016.09.04 |
전략적 CSR, 전략적 기업사회공헌의 네가지 관점...(1) (0) | 2016.08.29 |
기업사회공헌의 포트폴리오...부족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 (0) | 2016.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