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IKEA)의 CSR(1)
- 스웨덴을 향한 긴 여정의 시작 -
네번째 CSR 유럽투어를 가야만 하는가?
솔직히, 10월 3일에 출발 예정인 세번째 CSR 유럽투어가 마지막일꺼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2년에 한 번 이긴 해도, 말도 잘 안 통하는 유럽에 가서 안 그래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글로벌 기업 CSR 담당자를 다짜고짜 만나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일은 힘들고 고된 일입니다. 회사 이메일로 십 수차례 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어떻게 어떻게 담당자 페이스 북이나 인스타, 개인 연락처를 알아내 사정 사정을 해도 머나먼 한국에서 오는 낯선 사람들을 썩 반기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유럽 친구들이 한국 기업들의 CSR 수준을 높게 보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간다고 하면 의아해합니다. 또,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너네들이 먼 곳까지 와서 한 두시간 내 얘길 들어봐야 잘 알아 듣기나 하겠어, 우리 회사 홈페이지나 지속가능 보고서에 다 나와 있거든,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라고 솔직한 답메일을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싼 돈 들여 괜한 고생하지 말고 이번만 다녀오고 '그만 하자'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다시 2년 후 유럽행 비행기를 타야겠다고 이번 추석에 마음 먹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이케아(IKEA)' 때문입니다.
지속가능경영 세계 4위, 이케아(IKEA)
CSR과 지속가능경영 영역에서 앞선 회사들을 조사하는 글로벌 리서치 기관인 GlobeScan & SustainAbility에서 매년 지속가능성 대표기업을 조사하여 발표합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동안 1,2,3,4위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1위는 유니레버, 2위는 파타고니아, 3위는 인터페이스, 4위가 바로 이케아(IKEA)입니다.
유니레버는 '삼고초려' 만에 드디어 이번 10월7일 오전, 런던 본사를 방문하게 되었고(만세!! 만세!! 만만세!!), 2위 파타고니아는 알다시피 2016년과 2018년에 이미 두 번 다녀왔으니 또 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5위 M&S는 첫번째 투어때, 7위 네슬레는 두번째 투어때 본사 방문을 했습니다. 이제 인터페이스나 이케아를 가볼 차례입니다. 인터페이스는 미국에 있고, 이케아 본사는 네덜란드와 스위스에 나눠져 있으니 계획을 잘 세워서 네번째 CSR 투어는 네덜란드 쪽을 한 번 가볼까 생각 중입니다. 아무래도 저의 이번 생은 사서 고생하는 생인가 봅니다. 같이 사서 고생하실 분 모십니다.
아무튼, 이케아는 세계 최대 가구회사인 동시에 지속가능경영에서도 세계 4위를 차지하는 만큼 만만치 않은 상대이기 때문에 단 한번에 소개하는 것은 '완전 무리' 입니다. 가능하면 세번 안에 끝내려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렸을때 부터 장사꾼이었던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
1943년 기술학교(우리나라로 치면 특성화 고등학교)학생이었던 열일곱의 '페오도르 잉바르 캄프라드(Feodor Ingvar Kamprad : 이하 캄프라드)'는 자신의 이름과 태어나고 자란 고향 농장 스웨덴의 '아군나리드(Agunnaryd) 엘림타리드(Elmtaryd)'의 첫 글자들을 따 이케아(IKEA)라는 소매 통신업을 개업합니다. 독일 작가 '뤼디거 융블루트'가 쓴 "이케아(2006년)"를 보면 캄프라드는 어렸을 때 부터 도시에서 성냥을 사와 시골 동네 어른들에게 파는 등 장사에 관심과 소질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12살 때 부터 당시 우편 배달도 함께 했던 우유 배달 트럭을 이용해 펜, 지갑, 시계, 크리스 마스 카드 등을 우편 도매로 구입한 후 주변 동네 사람들에게 직접 소매로 파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재 기술을 다루는 기술학교를 다니던 17세에 자신의 집 한 구석에 "이케아"를 창업했습니다.
처음엔 생활 잡화와 문구를 주로 판매하였고 1948년 부터 주변에 많던 가구 공장들의 제품을 다른 곳에 통신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1951년에는 가구만을 판매하기로 결정했고, 1953년 스웨덴의 '알름훌트(Almhult)'라는 작은 마을에 현재의 이케아 매장과 같은 전시 매장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이케아의 첫번째 매장입니다.
나치 추종자, 세금 도피 망명자, 인색한 일 중독자..
뤼디거 융블루트는 그의 책에서 캄프라드를 나치 추종자, 세금 도피 망명자, 인색한 일 중독자로 서술합니다. 독일계 스웨덴인이었던 그의 할머니, 아버지는 히틀러 숭배자들이 읽는 책과 잡지를 읽었고 나치당의 극우 민족주의에 찬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캄프라드 또한 10대 시절에 스웨덴 파시스트 그룹에 동조하였고 나치당이 개최하는 청소년 캠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중학교 시절 동기생들과 파시스트 비밀 조직을 만들기도 했으며 나치 마크를 자랑스럽게 그려서 가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고 나치당이 궤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캄프라드는 또 다른 나치 스타일 조직인 '네오-스웨덴' 운동의 리더였던 '페르 엥달'과 친하게 지냈으며, 엥달은 캄프라드의 결혼식에 참석해 축시를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언론이 캄브라드의 나치 전력에 대해 시시때때로 문제를 삼았으나, 그는 '어린 시절 철 없는 행동' 이었다며 젊은 시절 잠깐 동안 나치 운동에 휩쓸렸던 점을 모호하게 인정하였습니다. 이후 세월이 한 참 흐른 후에 이 일을 문제삼은 직원들에 대해 사과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의 나치 참여 흔적은 평생 그를 따라 다니는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이케아는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값 비싸고 무거운 "재산"으로 취급 받던 가구를 값 싸고 유행에 따라 교체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인식 전환을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이유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유행한 '미니멀니즘'의 영향도 있었고 기성 세대와 단절을 추구했던 당시 유럽 젊은이들의 신문화운동도 한 몫 했습니다. 무엇보다 캄브라드는 당시 동서냉전 때문에 교역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생산 단가 측면에서는 서방 유럽보다 몇 배 더 저렴했던 폴란드와 소련 등에서 제품을 생산하여 수입하는 장사 수완을 발휘하여 경쟁 가구회사들을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었습니다.
스웨덴과 독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캄브라드는 1978년 가족과 함께 고국이자 이케아의 본사가 있는 스웨덴을 떠나 스위스 로잔 호수 주변의 작은 마을 '켈터킨덴'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유는 당시 네덜란드의 집권당이었던 사회당이 기업인들에게 소득에 버금가는 높은 소득세를 부과했기 때문입니다. 높은 소득세를 피해 스위스로 이주한 캄브라드에게는 '세금 도피 망명자'라는 또 하나의 꼬리표가 달렸습니다.
스스로 일하는 시간을 가장 즐거워했고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좋다는 생각을 했던 캄브라드는 확실한 일 중독자였습니다. 30대에 이미 큰 성공을 거두고 부자가 된 캄브라드는 한때 알콜 중독을 일으킬 정도로 술을 좋아했지만 술 보다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 때문에 첫번째 아내와 이혼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런 일 중독은 이케아 직원들에게도 강요되어 직원들과의 노동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급여도 다른 회사들에 비해 인색하게 주는 바람에 회사 직원들에게 캄브라드는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 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캄브라드는 2018년 1월 임종시까지 일에 몰두했고 30년 된 볼보 중고차를 끌고 다녔으며 비행기에선 이코노미석만 이용했습니다. 여행과 출장에선 항상 가장 등급이 낮은 호텔에 숙박하였으며 매장 바닥에 떨어진 몽당 연필 하나 때문에 매장 지배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제품을 포장하고 남은 자투리 포장 끈을 그냥 버린 직원을 향해 독설을 퍼부은 일도 있었습니다. 검소하다 못해 인색한 그의 생활과 업무에 대한 태도 때문에 이케아에서 일한 임직원들이 고생이 많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리스크 예방과 비용절감 때문에 시작한 CSR과 지속가능경영..
지금은 세계에서 네번째로 지속가능경영을 잘하는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1980년대까지 이케아는 비용 절감의 대명사, 일은 많이 시키고 월급은 적게 주는 인색한 일중독자들의 회사, 경쟁 기업들과 경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고 하는 승부집착 회사였습니다. 그런 이케아가 CSR과 지속가능경영에 눈 뜬건 1990년대 이후 리스크 예방과 비용절감 때문이었습니다.
이케아는 1991년 처음으로 환경과 사회분야 책임자를 임명하였으며, 2002년에야 CSR 팀을 조직하였습니다. 1991년은 이미 스웨덴을 비롯한 이케아의 가장 큰 시장이었던 독일과 영국에서 "환경이슈"가 크게 일어난 이후로 이케아의 사회, 환경 이슈 대응은 늦은 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케아가 1991년이 되어서야 사회와 환경 이슈에 눈을 뜬 것은 선제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1980년대 덴마크에서 이케아 제품에 대한 판매 금지 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케아의 일부 제품에서 덴마크 환경 기준을 초과하는 포름 알데히드가 검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케아 가구에 쓰인 목재가 기준치 이상의 농약을 사용한 숲에서 벌목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1990년대 들어 꾸준히 제기 되었던 제3세계 아동노동문제도 이케아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1992년 독일 언론에서 이케아의 제3세계 농장과 생산 협력공장에서 일하는 아동들의 문제를 보도하였고, 이어 시민단체와 소비자들의 이케아 불매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90년대는 미국의 나이키, 유럽의 네슬레, 이케아, 아디다스와 같은 글로벌 대기업들이 아동 노동문제에 휘말렸고 이후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과정에서 글로벌 기업들의 공급 사슬망 관리와 CSR 체계가 한층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시와 도시 인근에 지어진 대규모 이케아 매장에 대한 유럽 각국의 환경 규제가 강화되고 이케아 제품의 포장 폐기물에 대한 소비자 처리 부담이 늘면서 이케아는 더 이상 CSR과 지속가능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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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앞으로 두 세번에 걸쳐 지속가능경영과 CSR에 뒤 늦게 관심을 가진 이케아가 어떻게 세계 4위의 지속가능경영기업이 되었는지를 조금씩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블로그 찾아 주셔서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
다음 주는 "소벤야학 시즌 1_ 소셜벤처와 CSR의 만남 첫번째 강의 리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추석연휴가 끝났으니 이제 일 좀 해봐야겠죠^^
※ GlobeScan & SustainAbility 의 편집 자료는 SK행복한 재단 서진석 그룹장님의 블로그 'Beyond CSR' 에서 가져왔습니다. 고맙습니다.
Balanced CSR 유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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