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려 받은 사회공헌, 물려 줄 ESG
후배들을 열심히 만나고 있다.
요즘 후배들을 열심히 만나고 있다.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ESG, CSR 실무자들을 위한 <파타고니아 비즈니스 스쿨 2기(PBS)>가 5월 9일에, 대학(원)생들을 위한 <파타고니아 썸머 유니버시티 2기(PSU)>가 6월 27일에 각각 시작되었다. 후배와 학생들을 만나 "지구 환경과 인류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비즈니스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같은 주제를 가지고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요즘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동시에 마음이 아주 많이 무겁고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후배 실무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이 문득문득 들기 때문이다.
방탄 기부, 언론 보도, 그리고 봉사 시간
사회복지시설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내가 기업의 사회공헌 담당자가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다. IMF 외환위기를 지나는 과정에서 실업극복국민운동(1998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1999년) 등이 생겨났고, 정부와 언론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특히 기부와 임직원 봉사 활동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가하던 그런 시대였다. 어지간한 대기업들은 사회적 요구에 밀려 공익재단을 설립하고 사회공헌팀과 임직원봉사단을 조직했다. 나 또한 그 바람을 타고 기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
기업의 사회공헌 담당자로 일하면서 나를 참 불편하게 했던, 요즘 말로 치면 '현타'가 오게 만든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방탄 기부'였다. 당시에는 기업, 특히 재벌기업의 오너나 그 가족이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재벌 총수들은 언론 앞에 나와 고개를 숙이며 거액의 기부를 약속했다. 그리고 그 기부금은 기업명이나 총수 자신의 이름을 딴 공익재단을 설립하는 데 쓰였다. 그렇게 수백, 수천억의 기부금을 출연하면 언론과 법정은 한결 누그러졌고, 잘못을 저지른 기업 총수들은 병원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에 탄 채 법정에 출두했다가 어이없는 형량을 받거나 풀려나곤 했다. 나는 그런 장면이 반복될 때마다 속이 뒤틀렸다. 죄지은 만큼 벌을 받지 않고, 거액을 기부한 재벌 총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렇게 쉽게 감형을 받다니. 말 그대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장이었다.
둘째는 '언론 보도'였다. 당시 대기업 사회공헌팀의 공통된 KPI 중에 하나가 언론 보도 횟수였다. 사회공헌팀이 독립된 조직으로 운영되기보다 대외협력이나 홍보 조직 아래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회공헌 = 홍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담당 임원이 사회공헌팀에 요구하는 것도 늘 언론에 홍보될 "그림 좋은 이벤트"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결재를 받을 때, 그 사업의 실제적인 사회적 효과보다는 "조중동매경한경"이나 "KBS, MBC, SBS"에 보도될 만한 내용인가 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아무리 좋은 사업도 언론 홍보가 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다.
사회공헌 이벤트를 하기 전에 보도자료를 각종 언론사에 미리 배포하고(당연히 유료 배포이다), 행사 중에 언론에서 좋아할 만한 장면을 연출해서 사진을 찍은 후 그 사진을 다시 언론사에 보낸다. 그리고 그 보도자료가 주요 언론사에 몇 개나 나왔는지 숫자를 세서 보고하는 것이 나의 매우 중요한 업무였다. 당시에 이런 분위기를 타서 주요 신문사마다 공익 세션들이 생겼는데, 이 세션들의 주요 임무는 기업들의 사회공헌 특집 기사를 실어주고 거액의 협찬비를 버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현장에서는 애들 줄 간식비까지 아끼라는 소리를 들어 가며 사업을 하는데, 그런 공익 세션에는 몇천만 원짜리 특집 기사를 턱턱 내는 것을 보면서 말 그대로 현타가 왔다.
셋째는 '봉사 참여 인원과 시간'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 기업들은 임직원 자원봉사 시간을 가지고 경쟁했다. 2005년에 제정된 자원봉사활동기본법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 격이었다. 자원봉사기관들은 언론을 통해 국내 주요 기업들의 임직원 자원봉사 참여율과 시간을 비교하여 보도했다.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들은 한 명이라도 더 봉사활동에 참여시키기 위해 진짜 별짓을 다했다.
당연히 부작용이 많았다. 기업이 몰려 있는 주요 도시의 사회복지시설은 기업에서 온 봉사자들로 항상 붐볐다. 사회복지시설에서 실제 필요한 인원보다 더 많은 인원을 기업에서 보내니, 정말 쓸데없는 일을 많이 했다. 심지어 장애 아동들을 하루에 두 번씩 목욕시키고, 식사 보조가 전혀 필요 없는 어르신에게도 봉사자들이 밥을 퍼서 먹이는 웃지 못할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봉사활동에 참여한 기업 임직원들 사이에서도 너무 형식적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불만들이 많이 나왔다. 이런 문제를 모두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들이 안고 가야만 했다.
선배들이 물려준 '진정성'
갑작스럽게 양적으로 성장한 기업 사회공헌이 질적으로 따라가지 못하던 시대였다. 여러 문제들을 겪으며 후배들이 힘들어하고 헤매고 있을 때, 기업 사회공헌을 먼저 시작한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진정성'이라는 단어만 반복했다. 하지만 정작 선배들은 그 진정성을 스스로 실천하진 못했다. 그들에게 진정성은 자신이 속한 기업에 대한 충성심, 그 아래에 있는 하위 개념이자 선택적 행동이었을 뿐이다.
선배들이 말한 진정성은 기업 사회공헌을 실천할 때 기업의 유익보다 사회적 효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뜻이었겠지만, 실제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선배들은 진정성을 강조하면서도 기업의 유익보다 앞서는 사회공헌을 펼치지 못했다. 선배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에게 사회적 진정성이 우선인 사회공헌을 물려주지는 못했다. 선배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선배들이 먼저 경험했던 회사와 사회의 상황과 인식의 한계, 그리고 그들이 후배인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의식, 책임감 자체가 크게 존재하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기업사회공헌에서 CSR로, 그리고 지속가능경영과 ESG
2008년, 처음으로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담당자를 맡아 보고서를 발간했다. 당시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하던 국내 민간기업은 30~40개 정도밖에 없었다. 기업 사회공헌 업무에서 본격적인 CSR, 지속가능경영 업무로 업무 범위가 넓어졌다. 그러면서 CSR이 단순한 사회공헌이 아니라, 사회공헌을 포함한 기업의 사회·환경적 책임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서 공부가 절실히 필요했다. 대학원 수업과 해외 연수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즉 CSR이라는 것은 기부나 봉사활동과 같이 비즈니스와 별개의 '착한 일'이 아니라 비즈니스 그 자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 블로그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기업사회공헌=CSR>이라는 좁은 시각을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좁은 시각은 우리 사회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기업사회공헌은 질적으로 성장했다. 그 질적 성장에는 기업사회공헌 담당자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며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몇몇 업계 동료들과 함께 10회차(230여 명 참여)를 진행한 <기업사회공헌 아카데미>도 일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업사회공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성숙했다. 사회복지시설들은 무리한 임직원 봉사활동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전국 곳곳의 자원봉사센터들도 기업 임직원 봉사활동의 질과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언론들도 죄를 지은 재벌 총수들의 방탄 기부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내놓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기적 행태를 보이는 기업들을 향한 우리 시민들의 '반기업 정서'가 한 몫을 했다.
때마침 온라인 세상이 활짝 열리면서 스마트폰이 모두의 손에 들리게 되었고, SNS는 모든 개인이 언론이 되는 세계를 만들었다. 그런 세상에서 방탄 기부와 인력만 많이 동원하는 형식적인 봉사활동, 비즈니스는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돈 주고 사회공헌 특집 기사만 쏟아내는 기업들이 좋은 평판을 얻기는 어려워졌다. 특히 강제 동원 방식으로 진행되던 봉사활동은 코로나 시기를 겪고 MZ세대가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물려주기 싫은 ESG
2020년대가 시작하면서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ESG가 상륙했다. 2017년 금융기업에서 일하던 나는 EU와 싱가포르 등에서 ESG 투자와 평가가 본격화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금융사들은 2017년, 2018년부터 ESG 평가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와 함께 ESG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CSR과 지속가능경영, 그리고 ESG는 매우 직접적이며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눈에 띄는 키워드와 트렌드가 중요한 언론들은 아니나 다를까 "CSR의 시대가 끝나고 ESG 시대가 도래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나는 ESG를 결코 트렌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업이 가치사슬 전체에서 사회적·환경적 책임(CSR)을 성실히 수행하게 되면 당연히 이해관계자와의 갈등이 줄어들게 되고, 그것은 기업경영의 Risk 감소라는 결과를 낳는다. Risk 감소는 기업 자체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CSR이 비즈니스와 통합되어 선순환되면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수준은 자연스럽게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지속가능경영을 실행하는 기업을 평가하고 투자하는 프레임이 바로 ESG다.
그런데, CSR과 지속가능경영을 비즈니스에 통합할 생각은 하지 않고, 겉만 뻔지르르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 발간과 ESG 평가에만 매몰된 현재 우리의 모습은 후배들에게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기업, 대학원, 특강, 파타고니아 비즈니스 스쿨 등 교육의 자리에서 실무자 후배들은 현재 기업들이 CSR이나 지속가능경영을 하는 척하는 이유가 오직 'ESG 평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한다. 평가를 잘 받기 위해 현실을 과장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실무 현장에서는 지속가능경영이나 CSR을 안 하고 있는데, 마치 잘하는 것처럼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쓰고 ESG 평가에 대응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 진짜 현타가 오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요.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런 말을 매주 듣고 있다. 후배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섬뜩섬뜩하다. 십수 년 전, 고민이 가득했던 나에게 선배들이 "진정성"이라는 단어 하나를 툭 던지고 갔을 때가 트라우마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지 않는 게임을 하려는 지혜와 전술이 필요해요. 오목이 아니라 바둑, 100m가 아니라 마라톤을 뛰는 자세, 한 걸음 나가기 위해 반 걸음 물러서는 작전도 필요하죠. 한 번에 조급하게 해결하기보다는 회사 안에 내 편을 만들고, 그들이 나와 공감할 수 있는 사회·환경적 문제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서서히 "세뇌(!!)"하는 작전도 해야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겠다고 비싸고 아까운 계란만 계속 던지지 말고, 계란은 잘 먹고 체력을 보충한 후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회사 밖에서도 회사 일을 같이 고민하고 공감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독감, 외로움, 무기력, 현타 그리고 사직서를 이기려면 지지해 줄 수 있는 동료와 멘토가 반드시 필요해요."
물려 줄 ESG
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일상 업무에서 그때그때 쓸 수 있는 잔기술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것이 지금 나의 역량 안에서 후배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그리고, 아쉽게도 선배들이 나에게는 물려주지 못했던 것을 후배들에게 꼭 물려주고 싶다. 기업사회공헌, CSR, 지속가능경영, ESG가 껍데기가 아닌 실제 알맹이로 기업과 비즈니스 안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실무 역량", 그리고 그 일을 함께 할 뜻과 방향이 맞는 "동료" 이 두 가지를 후배들에게 꼭 물려주고 싶다. 나와 같이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만든 것이 바로 <파타고니아 비즈니스 스쿨>, <파타고니아 썸머 유니버시티> 이다.
나중에 시간이 흘렀을 때 나의 후배들이 "회사 일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파타고니아 비즈니스 스쿨>, <파타고니아 썸머 유니버시티>가 있어서 제대로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라는 말을 했으면 좋겠다.
올여름 매주 토요일, 후배들과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즐겁다. 그리고 이 만남이 나의 날을 무뎌지지 않게 만들고 있다.
Balanced CSR & ESG 유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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